수심결과 마음공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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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결과 마음공부 - YES24
괴로움의 소멸과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 누구나 접근 가능한 실질적인 마음공부에서 답을 찾다!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핵심사상이 녹아 있는한국의 대표적인 선서(禪書), 『수심결(修心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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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지눌 스님의 수심결
삼계의 뜨거운 괴로움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면서 그 기나긴 고통을 달게 받고만 있는가? 윤회를 벋어나고자 한다면 부처를 구하는 것이 제일이다. 만약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는 곧 이 마음일 뿐인데, 어찌 이 마음을 먼곳에서 찾고자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색신은 거짓된 것이어서 태어남도 있고 죽는 것도 있지만, 이 참된 마음은 허공과 같이 끊어짐도 없고 변함도 없다. 그래서 이르기를 사람이 죽으면 백 마디의 뼈는 부서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이 한 물건은 영원토록 신령스러워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는다. 라고 하였다.
슬프구나, 요즘 사람들은 미혹한 지가 오래되어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본성이 참 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진리를 구하고자 하면서 멀리 있는 성인들만 추앙하고, 부처를 구하고자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관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기의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갠지스강의 모래알 처럼 많은 법문과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한 뜻을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얻게 된다.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이룰수 있는 부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밖에서 구하지 말라. 마음의 본성은 오염된 적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으미, 단지 허망한 생각을 떠나기만 하면 곧 여여한 부처이다.
이 몸은 지수 화풍의 네 가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 성질이 무디고 둔해 아무 감정이 없는데, 어찌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필시 그대의 불성인 것이다.
그대 눈앞에 역력히 홀로 밝은, 아무 형상 없는 이것이 법을 설할 줄도 알고, 법을 들을 줄도 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 없는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란 곧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허망하게 밖에서 구하고자 하는가? 그래도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면, 간략하게 옛 성인들이 도를 깨달은 인연을 밝혀 그대의 의심을 풀어주고자 하니 그대는 잘 듣고 믿도록 하라.
불성은 작용하는 데 있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고, 혀에 있을 때는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으며, 발에 있으면 움직여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세계를 다 감싸지만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 속에 있습니다. 아는 자는 이것이 곧 불성인 줄 알지만 모르는 자들은 정혼이라 부릅니다.
그대가 바로 부처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보임(견성하여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하는가? 티끌 하나가 눈에 들어가면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는 듯하다. 그 스님은 이 말끝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돈오와 점수
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와 점수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를 최상의 근기인 이들이 들어가는 문이라고는 하지만, 과거까지 추론해 본다면, 이미 먼저 깨닫고(돈오) 그 깨달음에 의지해 오랜 세월 동안 점차 닦아 익혀 왔기 때문에(점수), 지금에 와서 듣자마자 깨달아 단박에 공부를 끝낸 것(돈오돈수)이다.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를 몸이라 여기고 망상을 마음이라 여겨, 자기의 성품이 참된 법신인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한 앎이 참된 부처인 줄 몰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처럼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이 가리켜 보이는(직지인심) 가르침을 통해 바른길로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회광반조)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 성품에는 본래 번뇌가 없고, 무루의 지혜 성품이 본래 구족해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 하는 것이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 온 습기는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하고 점점 익혀서 공을 이루고, 또 오랫동안 성인의 자질을 잘 길러나가야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 것이다.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은 충분하지 못하므로 많은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
알지 못하는 줄 알면 견성이다.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기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눈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신의 눈인데 어째서 다시 보려고 하는가? 만약 잃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신의 신령스러운 앎도 역시 이와 같아서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고자 한다면 곧 알지 못할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견성이다.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 그러므로 망념은 본래 고요하고, 티끌 같은 경계(객관 대상)는 본래 공하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그곳에 신령스러운 앎은 어둡지 않으니, 공적영지라는 이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면목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과 천하의 선지식이 서로 은밀하게 전한 법인이다.
반야 지혜로써 힘써 공들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돈오하여 깨달으면 부처와 같으나. 여러 생의 습기가 깊다.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여전히 침입한다라고 하신 말과 같다.
깨달은 뒤에도 오랫동안 관조하여 성찰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면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덜고 또 덜어내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그때가 비로소 구경이니, 천하의 선지식이 깨달은 뒤에 했다는 목우행이 바로 이것이다.
이 성품은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의 지혜와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단박에 깨닫고, 이 깨침에 의해 닦아나간다면 이것을 일러 최상승선, 또는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만약 순간순간 닦고 익히면 저절로 점차 백천 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 바로 이 선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이 이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빠지면 안된다.
망상을 없애려 애쓰지 마라.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알아차림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하였고 또 생각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면 곧 없다 라고 하였다. 순간순간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가벼워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더욱 밝아질 것이며, 죄업은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은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 할 때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미세한 번뇌도 영원히 끊어져 원각의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여 나투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되 아무런 근심이 없고 즐거우니, 이를 대각세존이라한다.
정혜의 체와 용 자기 성품의 체(본체)와 용(작용)의 두 가지 뜻에 불과하니, 앞에서 말한 공적영지가 바로 그것이다. 선정은 곧 체요, 지혜는 용이다. 그래서 체가 그대로 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 있지 않고, 용이 그대로 체이므로 선정은 지혜를 떠나 있지 않다. 선정이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는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도 항상 고요하다. 그래서 조계 스님이 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요, 마음의 어리석지 않음이 자성의 지혜이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만약 이처럼 깨달아서, 공적과 영지를 자재하게 굴려, 막음(선정)과 비춤(지혜)이 둘이 아니게 되면, 이것을 곧 돈오한 이가 정과 혜를 동시에 닦는다 라고 한다.
오늘도 내맡겨 흘러감에 자재하고, 내일도 내맡겨 흘러감에 자재하여, 모든 인연을 따르되 아무런 걸림이 없고, 선을 닦거나 악을 끊는다는 생각도 없으며, 곧고 꾸밈이 없어서 그저 무심하게 보고 들을 뿐이다. 상대할 대상이 하나도 없이 다 끊어졌으니, 어찌 애써 번뇌를 털어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허망한 감정을 일으킬 한 생각도 없으니 반연(경계나 인연이 다가올 때 거기에 마음이 끌려다니고 움직이며 혼란스럽게 얽히는 것)을 잊으려 힘쓸 것도 없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지도법사 대원정사 주지 www.moktaksor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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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돈오 점수 수행 열심히 하겠습니다.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