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여래출현품 여래 성정각 <종범스님>
안녕하십니까?
화엄경 여래출현품 제37인데 품수로는 37품인데요.
경으로 보면 3권이다. 일품 3권 제 50권 제 51권 제52권.
그런데 그 여래 출현품 삼권이 10단 경문으로 나눠져 있어요.
10단 단이라는 건 조각 단자인데 10단의 문장으로 나눠져 있거든요.
일품 삼권 10단 경문 이렇게 돼 있는데
제1단 경우는 여래 출현 인연이라 인연은 일인데
여래가 어떤 어떤 인연으로 또 어떤 사연으로 출연하게 됐는가 그걸 설명해요.
그런데 여래 출현은 한두 가지 인연으로 출연한 것이 아니라
무량 인연 한량없는 인연으로 출연을 했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그래서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무량 인연 공덕을 짓는 것이 성불을 하는 길이다. 이걸 설명하고요.
두 번째는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시면 여래의 몸이 있을 텐데 여래 신
여래의 몸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한 설명이에요.
여래의 몸은 어떻게 보는가?
이제 세 번째는여래의 음성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래의 음성에 대한 설명이고요.
네 번째는 여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래 힘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여래의 경계 경계라는 것은 머무르는 곳인데 여래는 어디에 어떻게 머무는가 이거거든요.
꿈꾸는 사람은 꿈 경계에 머물고 또 육도 범부는 항상 육진에 머물러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인식하고
이 색성향미촉 육진에만 항상 머물러요.
그래서 저 사람 뭔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거 모를 거 하나도 없어요.
본 거 생각 안 하면 들은 거 생각하고 음식 먹은 거 생각하고 따뜻하고 추운 거 생각하고 그것뿐이에요.
궁금할 거 하나도 없고 근데 범부는 육진 경계에 머무는데
깨달은 여래 제불은 어디에 머무는가 이제 여래의 경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요.
또 성불하신 여래는 어떤 행위를 하는가 여래의 행에 대한 설명이고
일곱 번째는 여래가 정각을 이루셨는데 여래 정각을 아뇩따라 삼먁 삼보리 이렇게 말하거든요.
아뇩따라 삼먁 삼보리는 여래가 깨달은 깨달음을 아뇩따라 삼먁 삼보리라고 그래요.
그럼 아뇩따라 삼먁 삼보리를 이룬 그 여래의 깨달은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이거고요.
여덟 번째는 여래 전볍륜 여래가 법의 수례를 운전하는 거 여래가 설법하시는 내용 여래는 어떻게 설법을 하시는가
아홉 번째는 여래 반 열반 반은 든다 이 말이고 열반은 불생불멸이란 말인데 불생불멸 청정국토의 여래는 어떻게 들어가시는가 이거고요.
열 번째는 여래의 초소에 친근하고 예경하고 공양하고 하면 어떠한 공덕을 이루는가 그 본문이 10번째예요.
그래서 10단 경문인데
오늘은 7번째에 여래 성정각 여래가 정각을 이루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그 부분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단 경문도 10절목으로 설명을 해요.
10절목 마디절자 조목이라는 목자 10가지 이 구절 구절을 나누어서 설명하는데
이 여래 성정각 10절 목 경문에서
제1은 여래의 정각에 대한 총설 전체적인 설명을 하는 부분이거든요.
佛子(불자) : “불자여
諸菩薩摩訶薩(제보살마하살) : 보살마하살들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成正覺(응운하지여래응정등각성정각) : 어떻게 여래·응공·정등각의 바른 깨달음을 알아야 하는가.
佛子(불자) : 불자여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 : 보살마하살은
應知如來成正覺(응지여래성정각) : 여래께서 바른 깨달음을 이룸이
於一切義(어일체의) : 온갖 이치에
無所觀察(무소관찰) : 관찰함이 없고
於法平等(어법평등) : 법에 평등하여
無所疑惑(무소의혹) : 의혹이 없으며
無二無相(무이무상) : 둘이 없고 모양이 없으며
無行無止(무행무지) : 행도 없고 그침도 없으며
無量無際(무량무제) : 한량이 없고 짬이 없으며
遠離二邊(원리이변) : 양 쪽을 떠나서
住於中道(주어중도) : 중도(中道)에 머물며
出過一切文字言說(출과일절문자언설) : 모든 글자와 말을 넘어설 줄을 알아야 합니다.
[출처] 37. 여래출현품 [3]/大方廣佛華嚴經卷第五十二(대방광불화엄경권제오십이) |작성자 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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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래 경계를 전부 보현보살이 설명을 하거든요.
질문은 여래 성기 묘덕보살이 질문을 하고 설명은 보현보살이 하는데
이제 보현보살이 여래 성기 묘덕보살에게 설명하기를
제 보살마하살 응운하지 여래응정등각 성정각 이렇게 스스로 자문을 해놓고
여기서는 여래를 응정등각 이렇게 표현했어요.
응정등각 응할응 바를정 그 바른대 응해서 등각 고 법신 진여와 평등하게 동등하게 깨닫는다. 이게 등각이거든요.
법신 진여와 아주 똑같이 깨닫는다. 이래서 응정이고 등각이다.
어떻게 깨닫느냐 망념 의식 허망한 생각 생각으로 아는 거.
망념의식이 아주 청정해져야 청정 진여 법신하고 딱 하나가 되요
망념의식이 청정해지지 않으면 응정이 안 되고 등각이 안 돼요.
그거 바른데 응할 수가 없어 응한다는 말은 합해진다는 말이거든요.
바른데 합해질 수가 없고 그 바른 것과 평등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등각이라 그러고 응정이라고 그러는데
이런 여래가 정각을 이룬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이제 이렇게 이제 질문해 놓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꼬.
불자야 보살 마하살은 응지 마땅히 알아야 된다.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여래 성정각은 여래께서 정각 깨달음을 이룬것은
어일체의에 일체의라고 하는 것은 옳을 의자인데
일체 차별법에 모든 차별 현상에 일체의에 무소 관찰하며 일체 차별법에 관찰하는 바가 없다.
이게 첫 번째 깨달음에 대한 설법인데 관찰하는 게 없어요.
그럼 관찰이 왜 없냐 관찰을 하는 것은 의심이 있어야 관찰하는데 의심이 있어야
그런데 여래 무상 보리는 일체법이 전부 평등법이고 형상이 없는 무상법이고 참 그대로 진여법이라고 하는 거를
철저히 궁극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무엇을 봐도 의심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의심이 없으니 관찰이 필요 없어. 이게 뭐와 같으냐
옛날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한 번은 그 추수 가을거지 곡식을 거두고 있는데 새가 날아와서 그 곡식을 먹어요.
그러니까 농부가 그 새를 쫓아서 그러니까 부자 주인이 새 쫓지 말라고 그래요.
그 새를 왜 안 쫓아야 됩니까? 그러니까 저 새가 어디로 날아가도 다 우리 땅이다 이랬어요.
어디로 날아가도 다 우리 땅이다. 그러니 이쪽 내 땅에서 쫓아서 저쪽 내 땅으로 보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 말은 죽는 걸 보든지 사는 걸 보든지 있는 걸 보든지 없는 걸 보든지 전부가 진여법이고 전부가 형상 없는 법이고 전부가 평등법이요.
그러니까 보는 것마다 의심하고 보는 것마다 살펴보고 보는 것마다 궁금하고 이거는 미혹법이에요.
보리법은 일체의 의심이 없으니까 일체 관찰이 필요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관찰할 필요가 없으니까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보는 게 아니라 가만히 보면 이 실눈만 떠도 다 알아요.
다 보고 그러니 눈이 바쁜 사람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고 의심이 많은 사람은 뭐 마음이 그냥 부산한 사람이여.
그러니까 이제 노인들이 귀가 잘 안 들릴 때 옆사람이 뭐라고 하나 궁금하니까 뭐라고 하느냐고 자꾸 묻거든요.
그거 물을 필요 하나도 없어요. 뭐라고 자기들끼리 얘기해봤자 전부 주고받는 세상 얘기예요.
누가 많이 받았더라 누가 적게 받았더라 누가 죽었다더라 누가 살았다더라 죽고 살고 크고 작고 그것뿐이요.
궁금할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깨달음을 얻은 여래는 어일체의에 무소 관찰이라 관찰하는 바가 없다.
그냥 훤하게 무분별 평등법이에요. 무분별 평등법 분별 이리저리 다른 거 없는 평등법이다.
그래서 다름이 없는 평등법에 마음이 도달한 것이 그것이 깨달음이다.
이렇게 시작을 해요. 그럼 깨달음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일체게 다 평등법이고 무상법이고 진여법이기 때문에 의심하고 살펴볼 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걸 여기서 여래의 정각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리고 어법에 평등하야 무소 의혹하며
법이 다 평등해 전부가 무상법이란 말이죠.
전부가 청정법이고 어떤 모양에도 모양이 없어. 그래서 다 허망하고 무상한 거라.
어떤 모양도 모양이 없어서 허망하고 무상한 거기 때문에
애착을 가질 만한 대상이 한 개도 없고 공포를 가질 만한 대상이 한 개도 없다.
애착과 공포는 미혹의 망상이다. 애착 가질 거 하나도 없는데 스스로 애착하는 거예요.
두려워할 거 하나도 없는데 스스로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럼 왜 애착을 갖고 왜 두려워하느냐 미혹하기 때문에 미혹해서 매달리고 미혹해서 무서워해요.
무서워할 거 한 개도 없고 매달릴 거 한 개도 없다. 그걸 여기서 깨달음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무이무상하며
둘도 없다. 다른 게 없다라는 거죠.
모양은 다른데 그 법성이 다르지 않다 이거죠.
왜 다르지 않냐 전부 이 모양 하나하나에 자체상이 없고 이타위성이라 다른 걸로서 자체상을 삼는다.
그러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고 무행무지하며
행위라는 건 막 움직이는 건데 움직이는 것도
그게 법의 본성에서 보면 아무리 움직여도 움직이는 게 하나도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화살이 많이 날아가도 허공은 날아가는 일이 없다 이 말이지.
그리고 이제 거울을 하나 딱 놓을 때 거울 앞에 물건을 계속 움직여도 그 거울 자체는 움직이는 게 없어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많은 현상을 보는데 눈은 한눈이 봐요.
눈 자체는 보이는 물건이 많다고 그래서 눈이 여러 개 되는 거 아니거든.
그래서 수많은 움직임이 있지만 사실 움직임이 없는 거다.
그리고 그친다고 그러는데 그치는 것도 형상이 그치는 거지 법성이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무행무지라는 거죠. 이 경지에 들어가는 걸 깨달음이라 그래요.
또 무량무재하며 한량이 없다. 이게 하나 둘 셋 넷 세는 거는 이건 생각이 하는 거지.
지혜로 볼 때는 하나가 절대 하나가 아니에요. 하나는 여럿이 있기 때문에 하나고 또 하나라고 하는 것도 이 물건도 하나라고 그러고 이 물건도 하나라고 그러고 이 책상도 하나라고 그러고 설법전 전체도 하나라고 그러고 다 틀리는 거예요.
그래서 전부 하나 둘 셋 넷 하는 거는 생각이지 법성이 아니다 이거지 법성에는 숫자가 없다.
그 숫자가 없으니 그걸 무량이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이 무량의 경지가 깨달은 경지다 이거죠. 원리 이변하여 두 가지 양쪽 끝 이변 두 가지 양쪽 끝 죽느냐 사느냐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머냐 가까우냐 이건 전부가 의식이 만들어낸 번내지
이 진성법성에는 두 가지가 전혀 없다. 죽고 사는 것도 없고 보이고 안 보이는 것도 없고 크고 작은 것도 없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현상은 생각이 만들어낸 현상이라는 거예요.
슬픈 것도 생각이고 기쁜 것도 생각이고 산다는 것도 생각이고 죽는다는 것도 생각이고 생각이 만들어내는 거지 실제로는 이변을 다 여의였다.
두 가지를 다 여인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가 없는데 딱 들어가는 게 그게 깨달음이에요.
우리가 괴로워하는 건 두 가지 때문에 괴로워요. 있다 없다.
산다 죽는다 크다 작다. 근데 이 두 가지는 생각에서 나왔지 법성에 있는 게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깨달아야 돼요. 빨리 깨달아야 돼.
그러니까 우리 앞에 놓이는 모든 문제는 다 내 생각에서 나왔다 이거예요.
이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내 생각이 깨끗해지면 양쪽 끝은 없다 보이고 안 보이는 거 없고 또 있고 없는 거 없다.
그럼 없다 그러면 없는데 자꾸 쫓아간단 말이야. 그것도 없다.
그렇게 되는 거죠. 뭐냐 뭐냐 하다 보면 도대체 이 뭐냐가 뭐냐 이렇게 되거든요.
뭐냐까지 없는 거예요. 모양까지 딱 그 부처님처럼 눈을 뜨 감은 듯 하면서 다 보고 다 보면서 감은 듯하고
왜냐 볼 게 없거든 볼 게 없어요. 또 들을 게 없거든 그걸 알아요.
볼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는데 중생이 그냥 자기 생각으로 보려고 하고 생각으로 들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아무리 들어도 듣는데 만족을 못해서 계속 더 들으려고 그래요.
아무리 봐도 보는데 만족 못해서 계속 더 보려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들여다보지 마세요. 그러면 더 봐 더 봐 엿듣지 마세요.
그러면 더 엿들어. 그럼 들을 게 있느냐 없어요. 스스로 듣는 거예요.
볼 게 있느냐 없어요. 스스로 보는 거예요. 이래가지고 주어 중도하며
중도라는 것은 있다 없다 크다 적다 이런 거 전혀 없는 진여적멸
적멸이라는 거는 나고 죽는 게 없는 게 적멸이거든요.
참 그대로 나고 죽는 거 없는 그 진실상 거기에 떡 머문다 이거죠. 주어 중도라 중도에 머문다.
중도 진여 적멸 중도 진여적멸이 중도인데 거기에 머무르며 출과 일체 문자 언설이라.
그런데 이 중도 진여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말이라는 거는 형상을 떠날 수가 없어요.
형상이 없으면 말이 안 돼요. 있느냐 없느냐 좋으냐 나쁘냐 이거지 형상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에
형상을 떠난 진여 중도를 형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일체 문자 언설를 출가했느니라.
날 출자 지나갈 과자 전부 지나가서 벗어났나니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마음으로 증득하는 수밖에 없어요.
언설로는 안 되고 마음으로 그럼 언설이 언제 필요하냐 그거를 마음으로 증득하는 고 밑 단계까지 말이 인도를 해줘요.
말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 그러면 바로 언설이라는 것은 그 증득하기 바로 밑에 단계까지 말을 해주면 그 마지막 단계는 지가 들어가야 되는 거거든요.
음식으로 설명을 하면 음식을 잘 차려서 갖다 딱 코앞에 들이밀면 먹는 건 자기가 먹어야 되는 거예요.
먹는 것까지 다른 사람 보고 대신 먹어달라고 그러면 저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나 귀찮으니까 내가 안 먹을 테니까 내 대신 네가 대신 먹어라 그러면 그 음식이 나한테 아무 이익이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 말을 떠난 경지를 마음으로 체험하는 거 이게 깨달음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내용을 마음으로 얻는 거
그래서 깨달음은 마음으로 얻는 거지 말로 하는 것은 고 마음으로 얻기 두 번째 단계 세 번째 단계까지 필요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인생은 지 마음으로 해야 돼요. 결국은 지 마음으로 해야 돼.
아무리 음식이 좋아도 자기가 먹어야지 먹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다음에 이제 다섯 번째가 있는데요.
佛子(불자) : 불자여
如來成正覺時(여래성정각시) : 여래께서 바른 깨달음을 이룰 때에
於其身中(어기신중) : 그 몸에서
普見一切眾生成正覺(보견일절중생성정각) : 모든 중생이 바른 깨달음 이루는 것을 두루 보며
乃至普見一切眾生入涅槃(내지보견일절중생입열반) : 내지 모든 중생이 열반에 드는 것을 두루 보는 데
皆同一性(개동일성) : 모두 같은 성품으로
所謂無性(소위무성) : 이른바 성품이 없음이니'
無何等性(무하등성) : 무슨 성품이 없는가.
所謂無相性(소위무상성) : 이른바 모양의 성품이 있고
無盡性(무진성) : 다하는 성품이 없고
無生性(무생성) : 나는 성품이 없고
無滅性(무멸성) : 멸하는 성품이 없고
無我性(무아성) : 나라는 성품이 없고
無非我性(무비아성) : 나가 아닌 성품이 없고
無眾生性(무중생성) : 중생의 성품이 없고
無非眾生性(무비중생성) : 중생 아닌 성품이 없고
無菩提性(무보제성) : 보리의 성품이 없고
無法界性(무법계성) : 법계의 성품이 없고
無虛空性(무허공성) : 허공의 성품이 없으며
亦復無有成正覺性(역부무유성정각성) :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성품도 없나니
知一切法(지일절법) : 모든 법이
皆無性故(개무성고) : 다 성품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得一切智(득일절지) : 온갖 지혜를 얻고
大悲相續(대비상속) : 크게 가엾이 여김이 서로 계속하여
救度眾生(구도중생) : 중생을 제도합니다.
[출처] 37. 여래출현품 [3]/大方廣佛華嚴經卷第五十二(대방광불화엄경권제오십이) |작성자 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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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성정각시에 여래가 정각을 이루었다. 그리고 정각을 이루고 딱 보니까 뭐가 보이느냐
어기 신중해서 정각을 이룬 여래의 몸에서 어기 신중해서 보견 일체 중생이 성정각하며 일체 중생이 다 정각을 이룬 것을 자기 몸에서 다 보게 돼요.
이게 이제 무서운 법문인데 내 몸을 딱 보니까 내 몸에서 일체 중생이 다 성불했더라 이걸 본다는 거예요.
그러고 내지는 일체중생이 열반에 다 들어서 열반에 들어서 개 동일성임을 다 하나의 법성 본성임을 널리 전체 다 보는데 이르렀나니라.
이게 이제 여래의 정각 관계예요. 정각을 딱 이루고 보니까 내 몸을 살피니까
내 몸에서 일체 중생이 다 정각을 이루어 일체 중생을 보니까 일체 중생이 다 열반에 들었더라 이거예요.
그러면 이게 뭐냐? 중생들은 없는 것만 자꾸 찾는데 있는 건 관심이 없어요.
항상 있는 건 안 봐요. 이게 중생이에요. 항상 있는 거 전혀 안 봐요.
그러니까 같이 사는 사람이 아무리 유능해도 같이 사는 사람 말은 안 들어.
왜냐하면 늘 가까이 보는 건 안 봐. 이거 참 이게 중생이에요.
중생은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항상 없는 거 없는 것만 찾아요.
그래서 중생은 없는 것만 찾는데 도가 높은 사람은 나에게 없는 게 뭐냐 있는 것만 봐요.
나에게 부족한 게 뭔가 나에게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게 건강한 정신이에요. 나에게 부족한 건 없다.
그런데 이제 이 중생들은 어리석어서 나에겐 아무것도 없다.
이걸 찾아요. 그래서 언제든지 뭐를 더 이루고 싶습니다.
이러면요. 어떻게 어떻게 하면 이루어라 하는 거는 이거는 중생사에서 하는 일이고
도인한테 가서 물으면 그대에게 없는 게 뭐냐 이걸 물어요.
흠개슴마 모자랄 흠자가 있는데 이낫개자 모자라는 것이 슴마 무엇인가
나에게 모자라는 건 하나도 없다. 내 있는 것만 가져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이게 건강한 정신이에요. 나한테 있는 것만 가져도 평생 쓰고도 남는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일체중생이 내 몸 안에서 다 성불을 했더라.
그러니까 이 몸에 없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내 몸이 법성법이고 내 몸이 형상 없는 법이라 내 몸이 청정법이라 내 몸이 청정한 게 일체 청정하고 똑같고 내 몸이 법성인 게 일체 법성하고 똑같아서 내 몸이 성불했을 때 일체 중생이 다 성불했다.
근데 왜 일체중생은 성불한 줄을 모르냐 이런 것을 의식 분별이라고 그래요.
의식을 가지고 나눠서 그래 나눈다는 말은 이게 자꾸 둘로 만든다 이거지.
둘로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고 이게 의식 분별이에요.
그래서 범부는 의식으로 살고 의식은 나누면서 산다 이거야.
그러니까 의식 분별이라는 거는 항상 둘로 나눠서 하나 버리고 하나 취하고 이게 의식 분별이거든요.
이것밖에 못해요.
둘로 나눠 그리고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쥐예요. 이래서 이제 돌아가는 게 생사윤해예요.
생사윤해 의식 분별 생사윤해 이게 이제 의식의 세계예요.이게 범부의 세계라고요.
그런데 이제 보살들은 반야의 세개인데 의식 반야
이 보살 반야는 어떻게 되냐 반야는 쫓아가는 게 아니고 비춰 보거든요.
딱 비춰보면 상의 상이 하나도 없어요. 자성이 다 공해서 색즉시공이요. 또 공도 공이 없어 공즉시색이요.
이래가지고 반야로 조견을 하면 바라보면 제상이 비상이라 모든 상이 상이 아닌거에요.
그래서 상에서 상을 넘어가고 생멸에서 정멸로 가기 때문에 그걸 도피안이라 그래요.
피안 피안에 도달한다. 그게 바라밀이에요. 상에서 상이 없는 데로 가는 거예요.
그게 피안이에요 생멸에서 적멸로 가요. 생멸 없는 데로 가 그게 이제 보살이란 말이죠.
보살은 반야요. 범부는 의식이오.
반야는 뭐냐 반야로 조견하면 제상은 비상이라 그러니까 취하고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거지.
그다음에 이제 제불은 보리인데 모든 부처님들은 의식도 아니고 반야도 아니고 보리다 보리라고 하는 것은 분별할 게 없고 의심할 게 없기 때문에 원명이라고요.
둥글 원자 밝을 명자 원명 보리는 원명이다. 다 보면 그냥 둥글고 밝은 거예요.
상에 상이 없어 공에 공이 없어. 허공과 같고 거울과 같고 물과 같아서 쥐하고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거죠.
취하고 버릴 건 전부 미혹 망상이 만들어내는 거다. 그래가지고 적조라고 그래요. 적조 고요히 본다.
고요할 적자 비칠 조자 원명 적조 의심도 없고 쫓아가는 것도 없고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고 항상 자제해요.
항상 그게 이제 보리란 말이에요.
그래서 범부 의식 보살 반야 제불 뭐라고 그랬어요? 조금 전에 이렇게 물으면 다 가만히 있더라.
보리 보리 삼세제불은 득 아뇩다라 샴막삼보리 이래 된단 말이에요.
제불은 보리요. 보살은 반야요. 범부는 의식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은 생각에서 나오는 거예요.
반야만 돼도 상에 상이 없는 걸 딱 보기 때문에 근심 걱정 없어요.
그렇지만 모르는 부분이 아직 남아 있는 게 반야의 세계거든.
보리는 모르는 거 하나도 없어 원명 적조할 뿐이에요.
둥글고 밝고 고요히 볼 뿐이에요. 그래서 이 보리의 세계는 무분별 대지에 무분별로서 모든 걸 다 알아 아는데 분별은 없어
분별은 취하고 버리는 건데 모든 걸 다 알아도 취하고 버리는 건 없어.
왜냐하면 취할래야 취할 것이 없어요. 법성 평등이기 때문에 버릴래야 버릴 것이 없어.
이거 버리고 저거 취하다 보니까 오히려 이것보다 저게 더 나빠 전부 이 모양을 하고 살아요.
우리가 아는 사람 버리고 모르는 사람 친해봤더니 모르는 사람이 나중에 더 힘들게 하네.
이거 참 보통 일 아니에요. 이게 이게 중생놀음이란 말이죠.
그래서 일체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생각을 맑히는 거다.
모든 문제의 핵심 열쇠는 생각을 밝히는 거다.
이거지 왜 생각이 중요하냐 생각대로 행동해요.
생각대로 생각이 없으면 행동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생각이 물건을 많이 모으는 게 좋다.
그러면 이 사람은 물건을 계속 모아요. 근데 생각이 물건이 너무 많으면 생활에 불편하다 싶어 이 사람 안 모아
그러니까 이 생각을 고치지 않고 행동을 고치려고 그러면 안 돼요.
아이들이 공부할 생각이 없는데 엄마들이 공부하라고 다그치면 안 해
그래가지고 이놈의 공부 이거 참 문제인데 공부처럼 하기 싫은 게 없는데 또 공부처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공부에 한 번 열을 내서 그 불이 붙으면 이게 물불 안 가리고 하는 법이 있어요.
또 도 닦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 도 닦는 거 이거 진짜 재미없고 하기 싫거든.
근데 이 도 닦는 데 한 번 불이 붙으면 이것처럼 재밌는 게 없어요.
그게 뭔 재미냐고요. 왜 그런 거 몰라 재미 많아요.
왜 재미가 없느냐 생각이 안 바뀌어서 그래요.
생각이 사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함께 살아도 같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억지로 친해지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어요
그거 하나가 된다고 하는 건 전부 거짓말이에요.
상대편을 나한테 끌어들이려고 하는 아주 엉뚱한 생각이고 아주 나쁜 생각이에요.
생각이 다르니까 절대 같을 수가 없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저 사람이 나한테 가까이 하면 좋고 가까이 안 하면 그만이고
거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요. 내 할 일 내가 하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열심히 하다 보면 자기 생각이 그쪽으로 바뀌게 되면 그 생각이 바뀌었을 때 어떤 일도 어렵지 않아요.
왜 어려우냐 생각이 안 바뀌어서 어려운 거예요.
생각이 바껴서 하다 보면 아무리 처음 하는 일도 설레고 더 하고 싶고 이렇지 하기 싫은 생각이 없어요.
그게 바로 인생이다.
깨달음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이제 인생이라는 게 이런 거니까
생각이 바뀔 때까지 계속 하면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
어려운 일은 생각이 안 바뀌어서 어렵다.
正覺了知一切法(정각료지일절법) : 깨달은 이 모든 법 분명히 아니
無二離二悉平等(무이리이실평등) : 둘 없고 둘 여의어 모두 평등해
自性清淨如虛空(자성청정여허공) : 제 성품 청정하기 허공과 같아
我與非我不分別(아여비아불분별) : 나와 나 아닌 것을 분별치 않네.
[출처] 37. 여래출현품 [3]/大方廣佛華嚴經卷第五十二(대방광불화엄경권제오십이) |작성자 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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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제 제일 마지막에 계송이 여섯 계송이 있는데요.
그 첫 번째 계송인데 이런 거예요.
정각은 여래가 깨달은 것은 요지 일체법이 요지는 안다 이 말이고 정각은 무분별과 요지가 있어요.
무분별과 요지 아는 것이 있어요.
분별이 있으면 정각이 아니고 모르는 게 있으면 정각이 아니에요.
분별 없이 아는 게 이게 올바른 깨달음이거든요. 분별은 없어.
근데 알기는 다 알아. 분별없고 알고 알고 분별없고 그래서 일체법이 무이 리이하야.
둘도 없고 둘을 여의여서 평등하며 다 평등한 것을 요지하며 전부가 평등함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다 평등해요. 티끌이나 허공이 평등하고 보이는 거나 안 보이는 게 평등하고 이게 진여법성이란 말이죠.
이걸 알기 때문에 알기는 다 아는데 분별은 하나도 안 해요.
무분별 일체지 일체를 다 안다. 그런데 분별은 없다.
그래서 자성 청정이 그 무분별 일체지 하는 그 자성이 청정한 것이 허공과 같아서 아여비아를 불분별이로다.
나와 나 아닌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게 이제 첫 번째 개성이거든요. 이렇게 해서 화엄 살림 다 잘하시고 끊임없이 정진해서 다 성불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하나.
https://www.youtube.com/watch?v=cHa1zrHqvaY&t=28s
[내 생각]
종범스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