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마음공부
https://www.youtube.com/watch?v=JeVO0D_I1LU
인생은 공부를 해야 되는데요. 공부하는 게 인생입니다. 근데 그 공부 중에 마음 공부라는 게 있습니다. 그 인생이 하는 공부는 전부 누구한테 배우는 거예요? 자연을 보고 산을 보고 배운다. 바다를 보고 배운다. 꽃을 보고 배운다. 사람을 보고 배운다 배우는 거거든요. 그게 전부 다르죠. 가르치는 사람마다 다 다르고 보이는 대상이 다 다르니까. 근데 마음 공부는 밖에 가서 배우는 게 아니에요. 이게 아주 중요해요. 보통 공부는 다른 데 가서 배우는 거다. 그런데 마음 공부는 다른 데 가서 배우는 게 아닙니다. 어디 가서 배울 데가 없어요. 어디 가서 배우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어디 가서 무슨 가르침을 받는다고 그래도 실제 공부하는 건 거기 가서 뭐 얻어오는 게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돼요. 어디 가서 뭐 얻어오는 게 아니고 어디 가서 뭐 배워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마음 공부는 하면 뭐가 좋냐 이 마음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마음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서 오직 인간으로 태어나서 참으로 할 일은 마음공부 하나뿐이에요. 이제 말씀을 들어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시게 될 거예요. 그러면 왜 그러냐 또 마음 공부가 왜 중요하냐 마음 공부는 뭐 하는 거냐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음 공부라고 하는 거는요. 그 의미부터 말씀을 드리면 마음 공부 의미 마음 공부는 내가 나를 찾는 거예요. 내가 나 찾는 거 아지 구아 공부다 찾는다는 말은 구할 글자 쓰거든요. 그 찾을 글자예요. 아지 내가 그 갈지자인데 나라는 게 앞에 들면 이렇게 주격 조사로도 써요. 불교 한자가 갈지자가 아지 그러면 내가 구아 나를 찾는 구하지 공부 나를 찾는 공부다 아지 구하지 공부다. 내가 나를 찾는 공부다 이거죠. 내가 나를 찾는 거예요. 엄마 찾아 삼만리 고향 찾아 오말리 그래 좋죠. 엄마가 늙었든 말았든 간에 고향이 뭐 없어졌든 있든 간에 좋아요. 그런데 문제는 엄마 찾는그 주체가 뭐며 고향 찾는 그 주체가 뭔가 내가 엄마 찾고 내가 고향 찾거든요. 근데 내가 나를 모르는 거예요. 다 아는데 내가 나를 모르는 거예요. 고향도 알고 엄마도 알고 아버지도 알고 옛날에는 남자가 수염이 있었어요. 근데 요새 수염 싹 없어졌어요. 이 수염 있을 때 그 남자 뭐가 나타나는데 수염 없는 남자는 옛날에 남자도 아니여. 그래가지고 남자 행세를 못하는 거야. 수염 싹 깎으면서 또 그다음에는 사랑이 없어졌어요. 사랑 사랑 없는 남자는 남자도 아니여. 그럼 뭣만 하냐 이제 요새는 일하는 것만 남았어. 일 그 일은 왜 하냐 돈 벌러 온다고 수염도 없어지고 사랑도 없어지고 돈 벌어오는 기능만 남았는데 돈 딱 못 벌어오면 쫓아내야 돼요. 그거는 그게 오늘날 아버지요. 그러면 없어진 걸 누군가 알 거 아니에요? 그게 나입니다. 아는 거 그러니까 없어지면 없어진 거 알고 보면 볼 줄 알고 들으면 들을 줄 아는데 그 보인다 안 보인다. 밖에 가서 뭘 하는 거는 잘하는데 이 안 보이는 거 아는 거 보이는 거 아는 거 찾는다 못 찾는다 그건 아는데 찾을 줄 아는 거 못 찾은 거 아는 거 이건 나거든요. 그래서 마음 공부는 내가 다른 데 가서 뭘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찾는 나를 찾는 거예요. 내가 나를 찾는 공부다. 이게 아지 구아지 공부다 이거거든요.
두 번째는 내가 나를 아는 공부예요. 내가 나를 알아요. 이게 이제 이걸 아지 증아지 공부라고 증명할 증자가 있어요. 증명이라는 건 손에 딱 잡히는 거 눈으로 딱 보는 거 이걸 정의라고 그러지 이게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려면 정이 안 되거든요. 아주 영역분명 역력하고 분명하게 보는 거 이걸 정의라고 그래요. 그래서 아는 것이 들어서 생각하는 게 아니고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이렇게 역력하고 분명하게 탁 잡는 거 딱 보는 거 그게 정의거든요. 그 보통 아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거 알아 그거 아니에요 딱 보고 알고 잡아서 아는 거 이게 아지증아 내가 나를 그렇게 영역 분명하게 아는 거 영역 분명하게 보는 거 그것이 마음 공부다 이거죠.
아주 정아지 공부라 또 세 번째는 내가 나를 쓰는 공부예요. 그럼 내가 나를 봤으면 어떡하냐 내가 나를 잡았으면 어떡하느냐 써야지 나를 근데 우리 인간은 그릇을 쓴다. 물건을 쓴다. 돈을 쓴다. 다른 사람을 쓴다. 다른 사람 쓸 줄 알아요. 근데 내가 나를 쓸 줄 모르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부정도 하고 인정도 하는데 내가 나를 얼마나 부정하는지 몰라요.
내가 나를 부정하고 다른 데 가서 인정받으려고 그래 나 잘났지 나 예쁘지 나 아직 점치 쓸만하지 아직 쓸 만한 사람이야.
내가 나를 인정을 안 하는데 왜 왜 나를 보고 무시하느냐 그러고 아니 내가 나를 인정하면 됐지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든 인정하든 아무 소용이 없는거에요. 내가 나를 안 버리면 됐지 다른 사람이 나를 버릴까 봐 엄청나게 애를 써요.
이걸 유기공포증이라고 그럽니다. 유기공포 버릴유 버릴기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 유기공포증이 심한 사람은요. 다른 사람을 이렇게 계속 간섭을 하고 자꾸 시비를 해요. 자기 버릴까 봐 그러는 거예요. 자꾸 간섭을 해요. 특히 지금은 안 그래요 안 그런데 옛날에 보면 나이 많은 남자가 젊은 부인을 얻으면 그 부인을 감시하고 감독해요. 왜냐 버리고 갈까 봐 그분 갈 데가 많거든 젊으니까 자기는 갈 데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남의 일에 계속 마음을 두고 그 간섭을 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자기가 버림받을까 봐 염려하는 유기공포증입니다. 그게 가거나 말거나 내가 나를 안 버리면 됐지 내가 나를 쓰지 내가 나를 고용해서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고용해서 밥도 하고 내가 나를 고용해서 청소도 하고 내가 나를 고용해서 사업도 하고 또 내가 나를 가만히 보면 내가 잘했으면 내가 나한테 상도 주고 내가 잘못해 너는 이번에 좀 잘못해서 앞으로 잘해 이렇게 격려도 하고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상을 줘 봤나 여러분 해보셨어요? 한 1년 다 돼가면 그거 자기를 한번 평가 너 금년에 했었다. 자기한테 상도 줘요. 밥도 좋은 것 좀 사주고 선물도 하나 내가 나한테 사주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안 뒤에는 내가 나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용아지 공부라 세 가지가 나왔는데요. 마음 공부는 내가 나를 찾는 공부 또 내가 나를 아는 공부 마지막에는 뭐라고 그랬지 내가 나를 쓰는 공부 아지 증아 아지 용아 아지 구아 이런 거거든요. 그러면은 이 마음 공부를 이걸 왜 하게 되는가 마음 공부를 시작하는 거 시작하는 동기가 있는데요. 나 나 이러는데 이 나라는 게 이게 이상한 거예요. 이거를 그냥 놓치고 살아요. 우리가 나나 이런 데 나라는 걸 그냥 놓치고 살아요. 그래서 도를 닿게 하는 도가문 중에서는 나에 대한 인식을 자꾸 깊게 하게 하거든요. 나 그럼 흔히 이제 생각하면 나인데 실제 이게 나가 뭐냐 이렇게 알아보려면 이게 이상한 거예요. 정체가 없어요. 그냥 그냥 의뢰 그냥 나다 나다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를 좀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볼 때는 심한 문제가 생겨요. 그게 뭔 소리냐면 과거나 현재나 미래야 미래 나 이렇게 본단 말이지 그럼 전중후 이렇게 하거든요. 전이라는 건 뭐냐 앞전자 전 그건 무슨 전이냐 부모 미생전 부모가 나를 낳기 전 자기 실상 자기 진실상 자기 진실한 모습은 시선마 뭐냐 이거지 그러니까 나 하면 그냥 이거 나 나 나 이래야 되는데 이거는 부모가 나를 낳은 이후의 얘기고 부모 미생전에 나는 그럼 그 진실성이 뭐였는가 완전히 없었는가 있었는가 그런 거잖아요. 심각한 거예요. 이게요. 부모가 나를 낳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연애한 적도 몇십 년 안 되는데 그럼 연애도 하기 전에 내가 어디 있었을까 그러면 만약에 결혼해서도 나를 안 낳기로 결정해버렸으면 나는 어디로 갔을까? 이거 심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 미생전 자기 실상 그러면 부모가 나를 낳아서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져 나가는데 그 생명이라는 말을 불교 용어로는 생명이라는 명자하고 뿌리 근자하고 명근이라는 말을 써요. 명근 명근 생명의 뿌리 그러면 이 생명의 뿌리라는 거는 열반경에서 세 가지로 이야기하거든요. 수난식이라고 목숨 수자인데 이 목숨은 호흡이에요. 호흡 목숨 숫자 그게 목숨이 그게 생명인데 목에 숨이 붙어 있느냐 안 붙어 있느냐 이거지 이런 거예요. 이게 숨 떨어지면 이거 안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난 몸에 체온이 있느냐 없느냐 따뜻하냐 싸늘하냐 그다음에 식이라고 그래서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이거 의식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안 하거든요. 그래서 호흡이 있고 체온이 있고 의식이 있어야 돼요. 이게 명근인데 명근은 이게 어릴 때 호흡하고 체온하고 생각하는 거 하고 젊을 때 하고 나이 들어서 하고 다 틀리거든요. 근데 이게 이제 완전히 그럼 딴 사람이냐 딴 사람은 아니고 상속을 해요. 어릴 때가 이제 젊을 때로 이어져 나가는 거죠. 상속 서로 이어져 나가는 걸 상속이라고 그래요. 지금 모습하고 어릴 때 모습하고는 다른데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거든요. 모양은 다른데 사람은 다르잖아요. 그럼 어째서 그러냐 상속해서 그래요. 이렇게 이렇게 이어지고 이렇게 이어지고 계속 이어져 나온 거죠. 그래서 이것을 명근 상속 중 명근이 상속하는 그 가운데에 자기 실상은 씻은 마오 나의 진실상은 과연 뭐냐 그러니까 이 나라는 게 코가 나냐 눈이 나냐 손이 나냐 뭐가 나냐 이게 오정육부가 나냐 귀가 나냐 명근은 계속 상속을 하는데 거기에 나는 누구냐 이거죠. 이 손도 어릴 때 손하고 틀리고 이렇게 상속해왔거든요. 이것도 변해가요. 이것이 중간나도 이게 불분명해요. 이게 명분 상속 중에 살아있는 도중에 중간 나도 이게 뭐가 나인지 이게 이상한 거예요. 재미없으세요 이런 얘기를 아주 그냥 피가 끓게 들어야 돼요. 피가 끓게 아주 중요한 거예요. 이게 그다음에 이 몸이 이제 가는데 호흡이 가거든요. 호흡이 가요. 그다음에 체온이 가거든요. 그다음에는 만져봐도 모르죠. 감각도 모르지 의식이 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나중에는 이 혈액도 가거든요. 나중에 뼈까지 가요. 이게 올 때도 서서히 왔지만 갈 때도 서서히 갑니다. 한꺼번에 다 가는 게 아니에요. 돌아가셨다라는 거는 숨이 끊어지면 돌아가셨다고 그러는데 그 숨 끊어진 게 다 간 게 아니거든요. 호흡만 떨어진 거예요. 그러면 숨이 져도 한동안 몸이 따뜻합니다. 그렇죠 근데 막상 이제 의식은 모르죠. 밖에 사람은 지금도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가는 거예요. 그럼 혈액은 또 그대로 있어요. 그럼 나중에 혈액가죠. 뭐 화장을 하든 어떻게 매장을 하든 나중에 이게 뼈도 가잖아요. 그러면 이거를 뼈까지 다 흩어진 거를 4대 홀산이라 그래요. 4대가 문득 흩어졌다. 그럼 사대 홀산 후 자기 실상은 뭐냐 이거예요. 이런 거예요. 이게 이 몸이 간단 말이여. 체온 가고 호흡 가고 가요. 의식하고 혈액가고 어떤 분은 뭐 화장 처음에 할 때 왜 사람을 뜨겁게 불에다 넣느냐 그러는데 의식이 가버리면 뜨겁고 차갑고 그건 문제가 안 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어둡고 무거운 땅속에 사람을 어떻게 묻어요? 화장이 뜨겁다면 매장도 그거는 힘든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똑같은 거예요. 태우나 흙 속에 묻어나 그 의식이 없다는 얘기죠. 그러면 이제 뼈까지 다 흩어지면 지수화풍이 홀연히 다 흩어진 거예요. 그러면 4대 홀산 후에 자기 실상은 뭐냐 자기 실상 시스마 뭐냐 이게 모르죠. 이게 이런 거예요. 우리가 이런 이런 인생을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뭐 나다 그래가지고 뭐 움직이고 그러는데 뭐 알 것 같죠 이게 뭐가 이게 손이 나지 손 나라고 안 해요. 손으로 누구를 때리면요. 네가 내를 때리냐고 그러지 손 보고 너만이 때려 이래 안 해요. 그럼 손으로 때려놓고 왜 때렸느냐 하면 손이 때렸지 나는 안 때렸다 그러면 말이 되겠어요. 누가 이제 뭐 욕을 했다고 그래요 다른 사람한테 욕을 하면 왜 욕을 했느냐 하면 내 입이 욕을 했지 나는 안 했다 그러면 되겠어요. 그럼 막 뛰어온다. 왜 그렇게 뛰어오냐? 다리가 뛰었지 나는 안 뛰었다. 그러면 그걸 누가 인정하겠냐고요. 그럼 이거 보면 다리가 뛰지만 뛰는 것도 나고 손이 움직이지만 움직이는 것도 나고 손도 나고 눈이 보지만 너 왜 보냐 그러면 내 눈이 봤지 내가 안 봤다. 그럼 말 안 되잖아요. 그럼 보는 것도 나고 그러니까 눈도 내가 없으면 눈이 아니라는 거지 기도 내가 없으면 왜 듣느냐 그러면 왜 엿듣느냐 기가 엿들었지 난 안 엿들었다 그러면 인정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귀도 나고 눈도 나고 손도 나고 다 나라는 거죠. 그래서 눈이 했어도 내가 하는 거죠. 손이 해도 내가 하는 거고 근데 막상 찾아보면 손에도 내가 없는 이거 아주 그냥 미칠 노릇이에요. 이게요. 근데 이런 거를 단 1분도 생각하지 않고 평생 살다 그냥 가버려요. 이렇게 내가 나를 안 찾아버려 나하고 원수지고 내가 나를 왕따시키는 거지 다른 사람이 나를 왕따시키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버리는 거지 누가 나를 버려 원수 왕따 등진다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나를 등지고 내가 나를 왕따시키고 내가 나를 원수같이 지내는 거예요.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죠.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거를 느끼면 아 이거 안 되겠구나 여기서 이제 마음 공부가 시작되는 거예요. 부모 미생전 나의 실상 명근 상속 중 나의 실상 4대 홀산 후 나의 실상이 과연 뭐냐 이거 이상하다. 이게 이제 마음 공부 시작이에요. 그럼 마음 공부를 어떻게 하는가 마음 공부 행도인데 마음 공부하는 길인데 행아학자 길도자 마음공부 행도 어떻게 하냐 첫 번째는 반성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걸 성찰이라고 그래요. 성찰 뭘 성찰하느냐 인간은 희로애락이 있거든요. 기뻐하고 분노하고 성내죠. 또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이런 희로애락이 있는데 이 희로애락이 뭐 때문에 생기는가 이건 순전히 나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이게 내가 없으면 희로애락은 없습니다. 나한테 잘하니까 즐거운 거죠. 나한테 잘못하니까 이게 화나는 거죠. 즐겁고 화나는 게 과연 뭐 때문에 즐겁고 뭐 때문에 화나느냐 순전히 나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없으면 화날 일 없고 내가 없으면 즐거울 일 없습니다. 나를 차니까 이제 나를 또 왕따시키니까 이게 화가 나지 저 돌멩이 갖다 버린다고 누가 화내요? 그렇잖아요. 쓰레기 버린다고 누가 화내요? 날 버린다고 하나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심리 못 가서 발병난다고 이왕 버린 거 발병나서 뭐가 좋아 그래 그냥 가서 잘 살아라 뭐 그런 그러니까 지금만 그 유기공포증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전에도 전부 버림받을까 봐 첫날 저녁에 소박 맞았다 이런 말 많아요. 첫날 저녁부터 소박 맞으면 그 참 심각하겠죠. 근데 다른 흙덩어리를 갖다 버렸다. 이것도 소박은 소박인데 버린 거니까 그 화나지 않거든요. 나를 버리니까 화가 나는 거지. 그래서 희로애락이 전부 나로부터 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 이게 나를 찾지 않으면 이게 희로애락의 근본을 몰라서 이 이상하겠다. 여기서부터 이제 딱 성찰을 하고요. 이 마음 공부하는 사람은 내가 막 즐거워도 돌아봐야 돼요. 내가 왜 즐거워하는가 자기가 바라던 것이 됐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거거든요. 세상이 세상에서 볼 때 유익해서 즐거운 게 아니라 세상에서는 해롭더라도 나한테 즐거우면 내가 즐거운 거야. 나를 위해서 화내는 거예요. 왜 그렇게 안 하느냐 그러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건데 그렇게 안 하면 나한테 손해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한테 손해가 가니까 내가 화를 내는 거예요. 우스우세요. 아이가 공부를 안 하면 화내죠. 그럼 공부 안 하는 건 아이인데 내가 왜 화가 나요? 그럼 아이가 공부를 잘해야 나한테 이익이 오는데 내 아이가 공부를 안 하면 나한테 손해가 오거든. 그러니까 내 아들이니까 화내는 거예요. 그게 그 남편이 좀 남편 노릇을 잘해줬으면 좋으련만 이게 그냥 시원치 않거든. 남편이 그게 화내는 거예요. 그런데 남의 남편은 현 괜찮거나 말거나 화 안 내요. 그러니까 남편한테 화내는 것도 나를 위해서 화내는 거고 자식한테 화내는 것도 나를 위해서 화내는 거고 모든 게 희로혈락이 나로부터 생기는 거거든요.
이거를 깊이 알면 이 정신이 건강해져요. 다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이거를 아주 깊이 알아야 돼요. 그러면 그다음부터 그런 게 와요. 희로애락이 전부 나로부터 온다. 그러면 나라는 건 뭐냐 나라는 건 이게 뭐 아까 얘기했듯이 손도 내가 아니고 손 하나 없어도 나거든요. 코도 내가 아니고 귀도 내가 아니고 나라는 건 뭐냐 순전히 마음이에요. 나라는 건요. 나라는 건 유심이다. 오직 마음이다. 마음 하나뿐인 거예요. 나라는 게 손이 나갔죠 아니에요. 이게 이제 여기 손이 이거요. 손이 나라면 이 손을 떼어서 딴 데 놓으면 그게 나인가요? 아니에요. 이게 손가락이라고 그러는데 이게 내 몸에 이제 붙어 있으니까 손가락이고 띄어서 딴 데 놓으니까 손가락이에요. 이게 그냥 살점덩어리지. 그러면 이 손가락 일수는 내 몸에 붙어 있고 이게 내 몸에 붙어 있어도 이게 움직이는 건데 움직이 살점덩어리가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내 마음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움직이는 그 자체 손가락이 움직여도 마음이고 발가락이 움직여도 마음이고 눈이 움직여도 마음이고 생각이 움직여도 마음이고 온몸 전체가 마음 하나뿐인 거예요. 이제 이건 거예요. 방구를 껴도 마음이고 밥을 먹어도 마음이고 일체의 몸 일체 행동이 전부 마음인 거예요. 이게요. 마음 없으면 몸도 없는 거고 그냥 고깃덩어리 뿐이에요. 마음 없으면 마음 없으면 뭐라고 그래요? 요즘 말로 주검이라고 그러죠. 주검 주검인 거예요. 주검 시신 시신이라고 하더라고요. 시신 그냥 죽음인 거예요. 그게 전부 마음인 거예요. 이게 이 머리카락도 마음인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 떠는 사람 아무것도 없는 그러니까 그런데 찾아보면 없거든 전체가 마음인데 이거를 직접 보는 게 이게 이제 내가 나를 아는 겁니다. 그거예요. 이거 얘기 잘해야 되는데 이거 잘못하면 그러하려면 이제 일체가 유심이니까 나라는 건 오직 마음이니까 반조 자심 자기 마음을 돌이켜보는 게 이게 마음 공부의 핵심이에요. 어디 가서 뭘 얻어오는 게 아니라 얻으러 가는 내 마음을 돌이켜보는 거. 그래서 이걸 돌이킬 반자하고 빛을 쫓자하고 반조 아자는 유심이다. 나라는 건 오직 마음이다. 숨 쉬어도 이게 마음인 거예요.
밥 먹어도 마음인 거예요. 말해도 마음 생각해도 마음인 거예요. 근데 찾아보면 없는 게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반조 자심 자기 마음을 반조하는 거죠. 이게 뭐냐 숨 쉬고 밥 먹고 움직이고 희로애락을 느끼고 그냥 동분서주하고 이 사람 기억하고 저 사람 판단하고 이게 도대체 뭐냐 이게 저 사람이 나쁘다. 이거는 판단하는 내용이고 그럼 누가 나쁘다고 하느냐 이거죠.
왜 나쁘다고 하느냐는 뻔해요. 자기한테 잘못하니까 나쁘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러니까? 정신 치료할 때 그 말 왜 해 이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거는 핵심 감정이라는 건 자기를 위하는 마음 하나뿐이다. 이거예요. 모든 문제는 자기 문제다. 이거 알게 하려고 감정이 수만 가지가 있는데 거기에 뿌리 핵심 감정은 자기 문제거든요. 이해가 안 되세요. 그냥 돼요가 아니라 그냥 피가 뜨겁게 돼야 돼요. 그래야 이게 이제 반성이 돼서 이제 나를 찾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제 그다음 단계는 마음 공부에 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자기가 볼 때가 오는데요. 이걸 자증이라고 그럽니다. 자증 처음에는 성찰 두 번째는 반조 세 번째는 자기 마음을 자기가 봐요. 이걸 자증 스스로 증명한다 이거죠. 스스로 증명해.
그러면 이제 이 자증에 들어가면 내가 저 경계를 대상을 보는데 깊이 깊이 대상을 보면 대상이 없는 거예요. 이걸 견공이라 그래요. 견공 경계가 공했다. 뭐 꽃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꽃 가서 깊이 보면 꽃이 없어요. 하늘이 맑다 그러는데 하늘 가서 찾아보면 하늘 없습니다. 바다가 어떻다고요? 바다 자세히 보면 바다도 없어요. 이거 참 뭐 아름답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아주 자세히 깊이 깊이 보면요. 아름다운 거 없어요. 이게 순전히 있다든지 없다든지 뭐 좋다 나쁘다 순전히 이게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물건인 거예요. 그래서 마음 공부가 깊이 들 때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이 경계가 공한 것이 보여요. 대상이 빈 것이 보인다고 이게 견공이에요. 그러면 마음이 계속 대상을 쫓아갔는데 대상이 공한 것이 보이니까 그다음에는 대상이 공함을 보는 내 마음도 비었어요. 이걸 심적이라고 그래요. 심적 경공 심적의 경지가 탁 나타나는 거예요.
마음도 적적하고 경계도 공했단 말이에요. 견공 심적 그러면 그다음은 뭐냐 견공 심적 후 어떻게 되냐 일광이 동로라 한 광명이 홀로 드러나여 경공심접 일광 동로 있을 노자 있잖아요. 그 드러날 노자 한 광명이 홀로 드러나버려요. 이것이 이제 자증이에요. 경계도 공하고 내 마음도 공하고 그럼 뭐냐 한 광명만 홀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에 뭐냐 이제 자용이거든요. 스스로 쓰는 거예요. 자용인데 그 자용은 그 일광 한광명만 쓰는 거예요. 경계도 없고 마음도 없고 뭘 써도 그 한광명뿐이에요. 일광 그것뿐인 거예요. 그거 자기가 쓰는 거예요. 써도 써도 억만년을 써도 허공에 구름 한 점도 못 써요. 그러니까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쓰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 매달리고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고 그냥 그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런 걸 전부 전도몽상이라고 그래요. 나의 광명을 내가 쓴다 이거지 재미없나 오늘은 이상하네. 이런 본문을 잘 들어야 돼요. 나를 내가 쓰는 거예요. 내 광명을 내가 쓰는 거예요. 그래서 되는데 이제 이런 경지를 그 홀로 드러난 한광명 일광동로 이런 거를 여러 경전에서는 홀로 드러난 한광명이 뭐냐 둥글 원자 밝을 명자 원명이라고 그래요. 둥글고 밝아 끝이 없어요. 이거는 또 항상 밝아 원명 원명인데 이 원명이 이제 막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하는 것을 지혜지자 쓰용자 지용이라고 그럽니다. 원명 지용 둥글고 밝은 지혜만 항상 쓰는 거예요. 그것이 이제 반야심경에서 무가에 무가애고 무유공포 이거예요. 이게 지용입니다. 이게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 원리 전도몽상 이게 내가 나를 모르고 그는 이제 동서 사방에 스스로 매달린단 말이죠. 그거를 이제 심각한 말로 처박힌다고 그래요. 내가 나를 모르고 곳곳에 처박혀 그래 물건을 보고 거기에 매달리면 물건에 처박히고 아 이거 처박힌다는 말이 아주 절실한 말이 사람에 매달리면 사람이 처박히고 사람이 처박힌 사람 많아요. 자식에 매달리면 자식에 처박히고 돈에 매달리면 돈에 처박히고 이런 거를 미할미자 쓰용자 미용이라고 그럽니다. 미용 이게 의상 스님 본문에 지용 미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얘기를 해요.
지용은 원명자제한 지혜를 마음대로 쓰는 건데 그거는 무가의 무유공포 원리 전도몽상 이걸 말하는 거죠. 근데 보는 대로 쳐박혀 이게 미용이에요. 미안 작용이다 이 말이죠. 그럼 이렇게 원명 지용이 되면 어떻게 되냐 어업 자제라 모든 법의 자제로워요. 괴외가 없어요. 괴외에 처박히는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73개에 대해서 원명 지용에 대해서 어업 자제에 대해서 아주 처음부터 쫙 자기 마음을 자기가 쓰는 단계를 설명한 게 화엄경인데요. 화엄경은 시작이 시성 정각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다는 데서부터 시작을 하거든요. 그럼 정각이 이렇게 내가 나를 바르게 안 게 정각이에요. 내가 나를 바르게 안 게 그럼 내가 나를 바르게 알면 어떻게 되냐 처음에 그런 게 있어요. 지혜가 있는데요. 그래서 자기가 여기서 이제 나를 지혜라고 표현한 거죠. 마음이란 지혜나 전부 명칭이거든요. 지혜가 3세에 들어간다 이렇게 출발해요. 지혜 3세 지혜는 수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 다 들어가요. 그래서 실계 평등이라 지입 3세 실계 평등 이렇게 나와버려요. 그냥 이게 아주 미치는 거예요. 이걸 보면 이게 지혜가 3세에 들어가서 다하다 평등하다 이 말이 도대체 뭐냐 이게 끝이 없다 이게 이 이게 지혜는 과거가 없어요. 지혜는 미래가 없어요. 지혜는 현재가 없어요. 뭐냐 그냥 원명 지용 그것뿐인 거예요. 원명한 지혜 변화 작용 원명한 그 지혜 변화 작용뿐이지 여기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러고 그다음에 뭔 말이 있느냐 하면 아 기가 막힌 귀신이 충만 일체세가 아니라 그 몸이 일체 세간에 충만하다 이렇게 나와요. 그럼 그 몸이 무슨 몸이냐 지혜의 몸이거든요. 지혜 다루고 몸 다른 게 아니라 지혜가 과거 현재 미래 3세가 없고 또 지혜가 일체의 세간에 이 시방 우주 밖에 없는 데가 없어요. 충만하다 이거예요. 이걸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마음 공부하면 이러한 지혜를 내가 찾아서 지혜는 바로 나다 이거지. 이 나의 지혜를 내가 마음대로 쓰니까 거기에는 무가에 걸리는 게 없다. 무효 공포 두려운 게 없다. 쓸데없는 생각 없다. 원리 전도몽상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모든 사람들이 그리 가야 된다. 아재아재 바라아재 발하승 아재 모제 사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내 생각>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내가 나를 찾자 (정견)
내가 나를 알자 (정사유)
내가 나를 쓰자 (정어, 정업, 정명, 정념, 정정진 · 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