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 큰스님 "나의 불교공부 이야기" 정리
일의 종류와 관계 없이 보리심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녕하세요.
특강 경교 경학 이야기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 시작
오늘 제목은요. 종범학인이 경험한 불교 학습 이런 제목이 되겠습니다.
제가 60년대 절에 왔는데요. 와서 뭘 했냐 떡방아부터 찍었어요.
옛날에는 절구통이 있었고 절구대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쌀을 불려서 4월 초파일 한다고 떡을 하는데 그걸 하루 종일 띠었어요.
근데 그걸 절구대를 헐렁하게 잡아야 되는데 꽉 잡아서 손바닥이 부르텄어요.
그 기억이 전혀 없어지질 않아요. 그리고 한 개 나물 묻히는 거 채공인데 그 나물을 묻히는데 그걸 손으로 직접 만지기가 싫어서 나물하고 된장하고 고춧가루하고 기름하고를 넣고 직접 손으로 안 하고 젓가락으로 이렇게 휘휘 졌어요.
그래서 올려놨더니 나물을 왜 이렇게 묻혔냐고 그냥 벼락 난리가 났어요.
그럼 어떻게 묻히냐 이걸 주물러야 된대요. 주무르고 주무르고 나물은 주물러야 맛이 난다.
근데 그 말도 틀렸어요.
나중에 보니까 고소 같은 거 묻힐 때 주물렀다가는 그거 버려요.
완전히 녹아버려. 그러니까 이게 뭐 이래가지고 이제 채공도 하고 공양주도 하고 법당도 맏고 온갖 것을 다 하는데 조금 먼저 오신 분은 계속 산에 가서 일만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스님한테 물었어요. 왜 절에서는 일만 시키냐 나는 책을 조용하게 보고 싶어서 절에 왔는데 왜 일만 시키냐 그러니까 이게 일이 아니다 이러더라고.
그럼 뭐냐 옛날에 석가모니가 깨닫기 전에 많은 어려운 일, 난행 괴로운 일, 공행 공덕대는 일 공덕행 착함이 되는 일 선업행을 계속 닦아서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이 모든 일 하는 게 깨달음을 이루는 원인 공덕 행이지 이게 일이 아니다 이래요.
그도 이해가 안 됐어요. 이게 일은 일인데 왜 일이 아니라고 그러느냐 근데 그분은 거기까지만 얘기하더라고.
근데 어느 큰스님은 대중들하고 계속 일을 하는데 힘들어하니까 현장에서 법문하기를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꼭괭이 삽 호미 이게 다 노동하는 도구가 아니라 해탈하는 해탈복이다.
해탈복 어떤 분은 깨달음을 이루는 일이다 이러고 어떤 분은 해탈하는 일이다.
해탈복이다 이렇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이게 뭐냐 강원에 가서도 일은 마찬가지예요.
근데 거기서는 독살이와 달리 소임이라고 하더라고요.
소임 공양주 소임 또 학인 소임 또 학인에 또 글 배우는 소임 글 가르치는 소임 소임이라는 건 임무를 맡은 바다.
이게 노동이라고 안 해요. 소임이야 그럼 소임은 왜 하느냐?
소임도 깨달음을 이루는 공덕행이다. 그래서 그걸 나중에 간단하게 정리해 보니까
일체 공덕행 일체 노력, 일체 힘든 일 하는 거는 노동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보리 인행이다.
보리를 이루는 원인 공덕행위다. 이걸 알았어요.
그런데 처음에 내가 절에 올 때 깨닫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그래서 보리심이 없어요.
그러면 하고자 하는 건 책 보는 게 나의 목적이고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근데 책 볼 시간은 전혀 안 주고 일만 시키니 아주 심사가 틀렸거든요.
아주 심사가 틀렸어. 그래서 오래오래 지나니까 그게 이해가 돼요.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근본이 보리심에서부터 출발하는데 보리심은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이 보리심을 기신론에서는 신성치 발심으로 직심이라고 곧을직자 마음 심자 직심인데 그걸 지혜심이라고 종민 선사는 가르쳤어요.
지혜심 그다음에 심심 깊을 심자 심심인데 그거는 일체 선법심이라고 일체 선법을 닦아가는 거를 심심인데 그거는 원력으로 가르치고요.
그리고 직심 심심 그다음에 또 하나 뭐더라 아 대비심이라고 대비심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 그래서 이거를 종민 선사는 지비원 삼심이 보리심이다 이렇게 도서에서 가르치고 있거든요.
지혜 또 원력 자비 그럼 이 세 가지 마음 중에서 한 가지를 뽑으라면 보리심 설명하는 일체 기록에서 원 하나를 뽑으면 된다. 원심 그럼 원심이 뭐냐? 성불하겠다는 원이에요.
이게 보리심이에요. 그럼 성불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다 성불하는 행위예요.
노동이 아니에요. 소임을 완수하는 게 아니에요.
뭘 하든지 전부 보리 인행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런 거를 교리적으로 설명해주는 분도 없고 또 뭐 상식적으로 말해주는 분도 없고 그냥 일만 잘하면 성불을 한다는 거예요.
아주 미치겠어요. 일해가지고 성부를 할 것 같지 않은데 일만 잘하면 성불를 한다고 아 이거 참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런 거를 총정리해서 요즘 제가 만든 말로 보리 인행 소임 학습이다.
보리 인행을 위한 소임을 보는 학습이다. 이 학습이 언제까지 가느냐 대중에 있으면 다 이런 소임을 보게 돼요.
단 소임이 평소임이라고 그래서 이제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하는 거는 그건 평소 의미죠.
그다음에 주지 정도가 되면 이게 이제 중 소임 그다음에 조실 정도가 되면 상 소임인데
평소임이든 중소임이든 상소임이든 이건 노동도 아니고 무슨 직업도 아니고 순전히 보리 인행인 거예요. 보리 인행.
그래서 이 직무를 통해서 권리를 주장하고 직무를 통해서 이익을 획득하려고 하면 이거는 태 보리심 마군 행자예요.
보리심에서 물러간 마군행이다. 그래서 난 상자들이 하는 게 시원치 않으면 너는 꼭 사마 외도다 이래요.
너는 보리심이 없이 그냥 대충 하는 사마외도 그럼 왜 사마외도냐라고 잘 묻지도 않지만은 맨날 해도 그 뜻을 몰라 왜 사마외도 인지 모든 소임이 이렇게 직권도 없고 직무에 따라서 이익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평소임이든 중소임이든 상소임이든 다 이거는 보리 인행이 바로 각자 맡은 소임이다.
이게 근데 이거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렸어요.
나도 근데 알고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열심히 뭘 하면 그게 바로 깨달음을 이루는 공덕행인 거예요.
내가 청소하는 게 아니라 지금 깨달음을 위해서 정진을 한다.
깨달음을 위한 불의행위고 깨달음을 위한 해탈 행위다 이런 거죠.
그게 계속됐어요. 그래서 그걸 종범 학인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런 게 전부가 보리인행 소임 학습이다 이렇게 정리를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이제 70년대에 들어와서 중강이라는 치문 사집을 가르치는 소임이 있는데 그런 것도 담당해보고 또 사교 대교 이런 경을 가르치는 소임이 있는데 그걸 그 당시 70년대는 그냥 강사라 이랬어요.
강사 그다음에 이제 강주라고 그러고 그런데 중강 중간 강사라고 강사 그랬는데 그걸 하다가 뭘 봤냐면
동국대학에서 나오는 불교 논문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게 절에서 강당에서 가르치는 거하고 전혀 달라요.
그리고 그다음 50년도에 동국대학교 어느 교수님의 해감 논총이 나왔는데 거기에 이제 처음으로 해인사 사관장경에 있던 조당집이 부록으로 실렸거든요. 그래서 해감논총을 아주 자세히 읽었어요.
이거는 강당에서 이 논강 문강하는 이런 식하고 전혀 다르다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그걸 읽다 보니까 이 글을 한번 나도 써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처음에 무슨 글을 썼느냐 하면은 오가해 금강경 오가해 중에 제일 끝에 들어가면 6조 해놓고 밑에 구결 이런 게 있어요.
그래서 그 육조 구결인 줄 알았죠. 그런데 나중에 금강경 언해보니 영인본으로 나왔어요.
그래서 금강경 언해 영인본을 보니까 그 글이 6조 글이 아니고 송대의 나적이라는 사람이 6조 의해 후서를 다룬 후서인데 끝부분은 생략하고 중간에 끊어서 나적의 육조 의해 후서를 6조 9결 뭐 이런 식으로 간행을 했더라고 아 이거 내가 한번 발표해야 되겠다 싶어서 70년대에 그 당시에는 불교신문에서 그런 학술 논문도 받아줬어요.
그래서 불교신문에 한 30매를 써서 발표를 했어요.
그게 제일 처음에 발표 그다음에 이제 전등록이라고 하는 책을 보니까 전등록이 한국에서 쭉 간행된 전통록이 있고 중국에서 계속 출판해 온 전등록이 있는데 이게 판이하게 달라요.
이것도 한번 발표해야 되겠다 이래가지고 2본 전등록 검토라고 그래서 했는데 이게 첫 번째 발표한 학회지예요.
이게 이제 한국불교학이라고 돼 있는데 한국불교학회 이게 1975년 5년에 나온 거거든요.
여기다가 발표를 하고 여기 보면 제일 끝에 2본 전등록 검토라는 게 여기 수록이 돼 있어요.
그래서 이제 학회지에 정식적으로 실린 논문은 여기가 처음이다.
그런데 논문을 써보면 굉장히 힘들어요.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그래서 뭐 슬슬 놀다가 70년대도 그럭저럭 놀고 80년대도 그럭저럭 노는데 이제 90년대쯤 가면 중앙승가대학이 이게 다 이게 이 비인가에서 인가 학교로 전환이 돼야 된다고 그래가지고 굉장히들 애를 썼거든요.
그 애쓴 것 중에 하나가 교수 논문집을 내는 거예요.
그래서 승가대학 교수 논문집 제1집이 92년도에 나왔거든요.
이걸 뭐 준비하고 그전에는 뭐 무슨 해지 같은 거 나올 때 글로 한 편씩 쓰고 이랬는데 그다음부터는 뭐 이게 논문집을 계속 내고 그 당시에 90년대만 하더라도 해갑 비염 논문집을 많이 냈어요.
그래서 별로 학문적인 경험이 없는 분들한테도 막 해갑 기념 논문집을 내서 막 공정을 해드리고 이런 게 있거든요.
근래에는 그런 거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도 글도 써내야 되고 그래 90년대에는 논문을 많이 썼어요.
근데 90년대 말쯤 되니까 이게 논문 쓰는 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이런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논문을 쓴다는 거는 내용을 보면 문헌 검토가 첫 번째예요.
문헌을 검토하고 그다음에 시대 배경이 두 번째예요.
그다음에 유통 영향 이런 기록이 유통되면서 어떠한 영향을 줬는가 이게 전부예요.
문헌 검토 시대 배경, 유통 영향 그래서 이거 해가지고 성불을 하겠나 이런 생각이 들고 그래서 학회에 가면 서로 깽판을 덜어놨어요. 지금 이렇게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고 하는데 이게 죽자는 거냐 살자는 거냐 한번 말해봐라 그러면 막 이상하게 싫어해요. 왜 그런 소리 여기 와서 하냐고 그런데 나중에 와서 그것도 이해하게 됐어요.
이 논문 써서 발표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이것도 보리 인행이다.
논문도 잘 쓰면 성불한다. 요새는 그래 말해요. 그런데 그걸 처음부터 말하는 게 아니라 논문을 왜 쓰냐 이렇게 물어 이걸 성불하겠다는 마음으로 업적이 늦게 나오든 빨리 나오든 상관없이 자기 원력으로 이걸 참 조심해서 깊이 있게 쓰면 이게 공덕이 되는데 이걸 빨리 어떤 학술 업적을 성취를 해서 현실적인 자기 권리를 도모하면 이것은 생사해탈 반야 업이 아니라 현존 생존 생사업이다.
그래서 논문 왜 쓰냐 자꾸 묻거든요. 그럼 뭐 대답을 잘 안 해요.
알고 대답 안 하는지 모르고 대답하는 이 논문을 보리심으로 쓰면 용수가 저술을 해서 교화했듯이 세친이 저술을 해서 교화했듯이 이게 그대로 보리 인행위고 교화 행위에요.
그런데 현실적인 자기 권리와 이익을 도모해서 쓰는 거 이거는 원력 반양업이 아니라 이건 생사업이다.
그러니까 이거 알고 쓰냐 모르고 쓰냐 이런 이제 시비조로 묻는 거죠.
근데 니가 쓰는 사람마다 논문 왜 쓰냐고 물었는데 명쾌하게 대답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
겨우 한다는 말이 잘 쓰면 좋지 뭐 논문 쓰는 게 그렇게 나쁜 일입니까?
뭐 이러더라고 이래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 논문이라고 하는 거는 요즘 말로 하면 인문학이에요.
인문학 인문과학 문헌 학습인데 이 학문의 계통을 따져보면 청대 고증학도 그거 일종이에요.
고증학이라는 게 청대에서 왜 일어났냐면 책이 너무 많고 새로운 자료가 막 지하에서 쏟아지니까 이 책을 연구하기 시작한 거예요.
처음에 책을 저술을 하다가 나중에 책을 연구하기 시작을 했어 같은 종류가 하도 여러 가지가 나오니까 우선 목록부터 알아보자. 고증학의 첫째 순서가 목록학이에요. 목록을 쭉 이제 조사를 해본단 말이에요.
그다음에 서지학이에요. 이게 이제 언제 출판됐고 어떤 체제고 목판이냐 활자냐 서진학적인 또 검토를 하는 게 굉장히 재밌어요.
이 화엄경만 하더라도 60권 화음하고 80권 화음하고 40권 화음이 왜 이렇게 다르냐 이걸 서지학적으로 검토를 해보면 아주 흥미가 진진해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이제 책에 대해 설명하는 게 서지학이에요.
목록만 추리는 게 목록학이고 책을 설명하기 시작한단 말이지 그다음에 교감학이에요.
교감이라는 건 서로 비교해서 검토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이쪽 책은 글자가 이런데 저쪽 책은 글자가 저렇다 뭐 이렇단 말이지 이게 이제 교감하는 교감학이거든 여기고 유럽에서는 또 인문학이라고 하는 게 발달했는데 인문학이 뭐냐 그러면 인문과학이라고 하는데요.
이 문학 철학 사학 문사철을 처음에는 인간에게 감동을 주고 생각을 주고 가치를 주기 위해서 인문학이 발달했는데 나중에는 이 인문학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걸 인문과학이라고 그래요. 자연과학 연구와는 똑같은 방법으로 자료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인문학적 학문이라는 거는 나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아요.
대상을 뭘로 잡으면 그 대상 자체로만 가서 계속 그것만 연구하고 검토하고 정리하지 그 관찰한 사람은 거기에 개입시키지 않아요.
그러니까 요즘 하는 말로 배운 사람이 왜 그러냐 그러는데 그건 인문학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옛날식 인문학은 사람이 변하는 건데 인문과학 인문학은 사람 변하지 않아요.
그냥 연구만 할 뿐이에요.
그래서 야 그렇다고 해서 이 불교의 경전이나 뭐를 많이 연구를 했는데 이걸 싹 다 갖다 불태워야 되나 아니면 이 인문학에 빠져서 보리 인행은 집어치우고 이것만 하다 죽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거 아니다 그럼 뭐냐 근본으로 돌아가야 된다.
근본이 뭐냐 항상 묻거든요. 불교가 뭐냐고 불교가 뭡니까?
그래서 거기서 기본적으로 대답하는 것이 법구경 하권 술불품이라고 하는 부처에 대해서 기술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불교를 칠불 통계라고 비바 시불에서부터 석가모니까지 칠불이 모두 다 가르쳤다고 그래서 그걸 통계라고 그래요.
거기서 계자는 말씀 은변에 계울 계 한 건데 가르친다는 소리 이거 뭐 석가모니불뿐 아니라 비바시불서부터 다 가르쳤다.
근데 그 내용이 뭐냐 죄악은 막작 하고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제손을 봉행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고
자정기심 마라 그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지제불교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결국 불교는 이거더라.
인문학을 한다고 해서 보심을 버리고 사회적 이득을 취득하려고 하면 이거는 생사업이고 논문을 쓰든 저술을 하든 항상 그 보리 인행으로 깨달음을 위한 원인행으로 정진을 해가면 그것도 또한 보리 인행이다.
그래서 뭘 하든지 보리심을 잘 간직하느냐 보리심을 내던지느냐 이게 죽느냐 사느냐 핵심이에요.
보리심 내던지고 하는 거는 전부 이거는 생사여 죽고 사는 거예요.
근데 이제 보리심으로 하는 거는 모두가 이건 해탈이다.
이 생사와 해탈의 갈림길이 보리심이에요. 지혜 자비 권력 지혜는 뭐냐 도대체 이 세계라는 게 뭘까?
그래서 이 세계를 직관하는 거 기신론에서는 정념진여라 바르게 진여법을 생각하는 거다.
뭐 이제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이 보리심으로 하면 저술을 하든 뭘 하든 다 보리인행인데
보리심이 희미하면 모든 선업이 다 마행이다 마행 마구니 행위다.
그래서 보리심이 얼마나 철저하냐 해서 상자들 보면 사마애도다 막 이래요.
근데 나처럼 이렇게 깊이는 모르겠지 왜 사마외도라고 하는지
사마외도라는 말은 나처럼 깊이 이해하면 그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입 내밀고 그럴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 입을 내민다는 거는 깊이 이해 못한다는 거거든요.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어떻게 해요?
나하고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가지고 늘 나오는 게 절에서 항상 법문할 때마다 재약막작 중선봉행 이 법문을 중국 8대 문장가라고 하는 백거이 백낙천 이름이 거의 자가 낙천인데 이 백거이 백낙천이 도림선사를 만났는데 이제 백낙천이 도림선사에게 묻기를 불교 대의가 뭡니까 하고 물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도림선사가 재악 막작하고 중선 봉행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백거이가 하는 말이 여기 써놨는데
백왈 백거이가 말하되
삼세 해아라도 야해 임마도라. 3살 먹은 어린 아이도 이렇게 말할 줄은 알겠습니다.
이랬거든 삼세해야 야해 임마도라. 3살 먹은 어린아이도 그런 말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도림선사가 뭐라고 했냐
삼세 해아가 수도득이나 3살 먹은 어린아이가 비록 말할 수는 있으나
80 노인이 행부덕이라 80 먹은 노인이 행할 수는 없다.
3살 먹은 어린 아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도 80 먹은 노인도 행할 수가 없다는 거야.
실행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거이가 뭐라고 했느냐 백수장녀라 백거이가 드디어 예를 올렸다.
수긍을 했다는 거죠. 이런 법문을 많이 해요. 그래서 아는 게 중심이 아니라 실행이 중요하다.
목이 자꾸 막히지 아이고 참 역시 실행이 잘 안 되는 모양이거든.
팔십해아가 수도득이나 삼세 해아가 수도득이나 팔십 노인이 행부득이라
이게 아주 너무 이게 뼈를 때리는 말이에요.
세 살 먹은 아이가 말할 수는 있어도 80 먹은 노인이 행할 수는 없다.
정말 그렇다. 그러니까 보리심 공덕행 이게 불교예요.
그러니까 이 보리심 공덕행으로는 저술을 해도 보리심만 있으면 그게 공덕행위.
근데 보리심이 미약하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건 생사업이에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한 거거든. 야 이거는 소임의 구분이 없이 평소임이냐 중소임이냐 대소임이냐 아무 상관없이 다 이게 보리심으로 하는 보리 인행이 되는 것이 이게 중요하다.
뭐 이런 거예요. 그리고 이제 학교에서 2008년 12월 28일까지 임명받은 기간이라 그 기간이 딱 끝나고 승가원 소임은 3월 초까지 다 끝나고 한 2010년서부터 2008년 3월에 다시 돌아가서 보니 그동안 또 학술 논문이 많이 발표가 됐더라고.
그리고 가만히 내 모습을 보니 이게 논문을 써도 그렇게 왕성하게 쓸 것 같지도 않고 안 되겠어요.
그럼 앞으로는 이제 뭔 공부를 해야 될까 생각이 된 거예요.
옛날 90년대처럼 이 문헌학을 중심으로 이 인문과학 문헌 불교학을 해야 되나 그건 도저히 허리도 아프고 꾀도 나고 힘들고 안 되겠어. 그럼 뭔 공부를 해야 되나 그래서 이제 발견을 한 게 뭐냐 하면 이 책이에요.
이 책인데 이게 해인사 사관장경에 있는 법계도기 총수록이라고 하는 책인데 이게 의상스님 의상 스님 제자들의 화엄경 공부 내용을 총 집대성한 건데 4권밖에 안 돼요.
근데 내용을 이제 이제 내용이 이렇게 됐어요. 이제 기 죽이려고 내가 가지고 나온 거 기를 이제 죽이려고 이런 건데 아 이 책이 이게 보통 책이 아니에요.
이게 왜 보통 책이 우리 중생에 이 오척신이라고 거기서 표현해 다섯 자 정도 되는 법니다.
오척신을 부동 오신이라고 질문해요. 부동이라는 건 무생이란 말인데요.
움직일 동자는 태어났다는 소리인데 이게 무생신이라는 거야.
이게 태어남이 없는 몸이라 이거요. 무생신 그래서 이 무생신에서 딱 관법을 닦아서 구래불을 아는 거다.
이게 의상화음이요. 무생신에서 구래불 구래불이라는 건 옛 구자 올래 자 부처 옛부터 그대로 온 부처 이 몸 자체가 생멸 없는 몸이니까 이 생멸 없는 몸이라는 걸 딱 믿고 여기서 옛부터 내려온 부처를 아는 게 이게 화음 공부다.
그래서 의상 화음에는 화음 뭐 저술이 없어요. 그냥 관법뿐이야.
희한한 화음이야. 중국 법장화음은 저술뿐이거든.
근데 의상화음은 저술이 없고 그냥 관법을 닦아요.
이게 근데 우리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 의상 화음이 관법 화음이라는 거를 그래서 거기서 이제 아주 감동을 받은 게 여기 자료에도 나와 있는데 총수록 네 번째 중에 첫 번째 30장 하에 뭔 말이 있냐 하면 의상 선생님은 이렇게 관법을 닦아서 제자를 친히 제도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아요.
중국의 현수법장은 저술만 했기 때문에 제자가 별로 없고 제자 하나 있는 게 내중에 또 반기를 들었어 회원이라고 그래서 그거를 독수생정이라고 평가를 했어요.
독수가 독묻은 나무가 화음 정원에 태어났다 그 모양이에요.
하나 있는 것도 반기를 들어가지고 독수생정이라 독수가 정원에 놨다고.
근데 의상은 10대 제자를 위시해서 삼천 제자 많은 제자가 있었어요.
그건 직접 관법을 지도하고 관법을 성취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래서 그게 이제 첫째 권에 30장 아래쪽에 보면 의상 제자 중에 이 지통이라는 제자가 있는데
지혜지자 통할 통자 지통이 화음 대벽산 미리혈이라고 하는 그 굴 속에서 화음관을 닦았다.
이렇게 화음관이라는 게 똑같아요. 부동오신 구래불 이 몸이 무생신이고 또 구래불이 있는데 무생신에서 구래불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구래불을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이제 화음 관법인데 관법을 딱 닦다가 어느 날 보니까 멧돼지가 지나가는 거예요.
지통에 머물러 있는 미리혈 앞으로. 그래서 그걸 보고 이제 목각 존상의 예경을 올리는데 나무로 만든 부처님 상이겠죠.
존상에 예경을 올리는데 예경을 지극 정성으로 간절하게 올리는데 그 존상이 비로자나불이면 비로자나불, 문수 보살이면 문수 보살 존상이 말을 해주는 거예요.
나한테 뭐라고 말을 해주냐
저 앞에 지나간 멧돼지는 너 너의 전생이고 나는 너의 후생이다.
그렇게 말을 해줘요. 근데 이게 웬 소리인가 싶겠지만 관법이 깊으면요.
하늘이 말을 해주는 걸 듣는 수가 있고 산이 말을 해주는 걸 듣는 수가 있고 저 돌멩이가 말을 해주는 걸 듣는 수가 있어요.
석가모니도 법을 설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딱하고 고심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법을 설하라 했다는 거 아니에요 하늘의 소리를 듣고 설법을 시작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요새도 보면 선지식이 없다. 스승이 없다 그러는데 그건 아주 고약스러운 소리예요.
왜 그러냐면 내가 스승을 찾는 마음이 청정하고 심오하면 스승이 보여요.
근데 내가 어디 가도 배울 게 없고 스승은 필요 없어.
스승은 다 재수 없는 거야. 만나기 싫어 안 보여요.
그래서 스승은 내 마음이 깊어져야 보이지 내 마음이 안 깊어지면 절대로 안 보인다.
뭐든지 이게 구하는 마음이 깊으면 하늘이 알려주고 땅이 알려주고 나무가 알려주고 다 알려줘요.
그래서 스승 없어 하는 사람은 내가 공부 안 했어 이거를 선포하고 다니는 거예요.
저 공부 지독하게 안 한 놈이구나. 아주 선포하고 다니는 사람.
그래서 의상 스님한테 가서 그걸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의상 스님이 법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거는 삼세가 일 찰라다.
과거는 멧돼지고 미래는 그 목각 존상이고 현재는 지통이고 과거 현재 미래가 한순간에 있다.
이게 화음이거든요.
그래서 화음이라는 거는 9세 10세가 호상직이고 무량원급이 즉일념이다 이거거든요.
9세 10세가 일 찰라에 있는 거예요. 무량 원급이 바로 한순간에 있는 거예요.
이거를 화음 원종 종지라고 해요.
원종 종지 이게 원이라는 게 이게 다 통한다는 거야.
무장 무에 원융 무에 그래서 화음화에서 가리키는 건 원교인데 원교는 삼세가 일념이에요.
삼세가 일찰라예요. 무장무예라고 그걸 관법으로 이 몸은 부동신이요.
일체는 구례불이다. 그래서 구례불을 화음관으로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게 그게 화음관이거든요.
그래가지고 이게 지통 같은 분은 지나가는 멧돼지가 자기 전생이고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자기 내생이고 지금 내가 바로 자기 현생이다.
어떻게 이런 걸 알았을까 간단한 거예요. 관법이 깊어지면 알아요.
근데 관법이 안 깊어지면 몰라. 근데 그다음에 이제 이거 또 법게도기 총수록 네 번째 권에 있는데 거기는 이제 무슨 말이 있냐 하면 그런 말이 있어요.
행인이 욕전 10불자는 수행하는 사람이 10불, 화음은 10불을 말하잖아요.
금강경 같은 때는 3불을 말하는데 10불 보연 대인경 이게 법성계에 있단 말이에요.
10불을 보고자 한다면 그다음 말이 의상 스님 말 이게 보통이 아니에요.
응 선작 안목이니 응당이 먼저 눈부터 만들어라. 선작 안목이라 눈부터 먼저 만들어라는 거예요.
그러면 눈부터 만들라는 말이 뭔 말이냐 이 화음경으로 우위 자안목하라.
화음경으로 자기 눈을 삼으라는 거예요. 이 화음경으로 우위 자안목하라 자 안목을 삼아라.
그래서 이 화엄경품은 이게 화엄경이 자기 눈이라는 거죠.
그래서 경을 보되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이 화음경으로 모든 걸 다 보는 거예요.
경을 보되 깊이 안 들어가고 경은 경 나는 나 이렇게 되면 이게 못 들어가.
그래서 경을 30년을 봤는데 부처는 본 적이 없다.
이거 잘못 본 거예요. 경은 부처를 보는 눈인데 그래서 안경은 썼는데 밖에 건 안 보인다.
이거 말이 돼요. 경이 이게 견불 안불 이란 말이에요.
부처를 보는 눈이란 말이지. 경이 그러면 경으로 눈을 삼아서 보면 부처가 다 보인다.
내 눈으로 보면 부처가 안 보이는데 경눈으로 보면 보인다 이거야.
이게 경안이에요. 경으로 눈을 삼아서 부처를 본다.
이런 가르침들이 옛날에는 다 있었는데 이게 중간에 소멸되고 나중에는 수행은 간화선언으로 완전히 독점 통일하고 교리는 강당에서 독점하고 이래가지고 수행하는 간화선 선자와 경을 얘기하는 학인이 만나면 원수같이 돼요. 원수같이 서로가 인정도 못하고 서로가 의심이 돼서 이게 아니에요.
이게 아니고 선이나 교나 부처를 보고 마음을 보는 통로예요.
그래서 참선을 해도 참선하는 이유가 뭐냐 좌선이 아니라 현 불심종이라 부처의 마음을 밝히는 종이다. 그래서 부처의 마음을 밝힌 그 사람을 조사라 그래요.
그래서 조사의 종단이라고 조종이라고 하거든요.
조종 조종은 글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견 불심이라 불심을 보는 종단이다.
이거예요. 견 불심종 불심을 보는 종이다.
그래서 그걸 조종이라고 한다고 화음을 원종이라고 그러고 그리고 부처님이 계신 불국정토에 바로 가는 게 이제 염불하는 건데 그 염불하는 정토종을 연종이라 그래요.
연꽃 연자 그래서 이 대승불교의 핵심이 정토 연종 화음 원종 조사 조정 그거예요.
조종은 다 필요 없어. 그냥 부처님의 그 마음의 진실성 그래서 그걸 본래 면목이라고 자꾸 얘기하거든. 설법은 했는데 설법한 그 설법으로 나타나지 아니한 마음에 진실성이 있다.
그놈을 보는 게 이게 조종이란 말이죠. 이게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이렇게 됐구나 싶어서 이 경을 옛날같이 보지 말고 좀 새롭게 봐야 되겠다.
그런 게 이제 이런 관법인데요. 관법은 뭐냐 말로 할 때는 정혜다 이러는데 이걸 실천으로 할 때는 혜가 먼저예요.
혜라는 게 뭐냐 딱 보면 정이 생겨 또 염불도 마찬가지.
뭐 처음에 선정에 들어서 염불하는 게 아니라 나무아미타불을 하면 거기서 선정이 생겨버려.
그래서 염불 한마디만 해도 극락 가요. 근데 안 믿는 놈 못 가 딱 내가 왕생극락해야 되겠다 그러면 나무아미타불 심념할 것도 없어. 한 번 딱 하면 거기에 정진도 생기고 선도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선정이 따로 필요가 없어요. 경보는 것도 마찬가지.
경을 딱 보면 그게 지혜인데 경을 보다 보면 거기에 딱 몸이 그쳐지고 마음이 그쳐지고 정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이제 보면 된다. 그냥 보면 거기에 혜와 정 이다.
그래서 이 간경하고 염불하고 하는 건 혜가 먼저예요.
보는 게 먼저예요. 정 그다음에 그런데 이제 정을 중심으로 하면 먼저 그치기부터 해야 되거든요.
이거는 선의 세계인데 이 교의 세계는 혜가 먼저라고 나무아미타불 하면 거기에 정이 들어있어.
그러니까 뭐 선정을 닦아서 염불하는 그거 아니에요 그냥 염불만 하면 바로 가는 거예요.
교를 하는데 교 닦고 정을 따로 이렇게 하는 게 이 교를 보면 그 경이 부처를 보는 눈이기 때문에 그냥 거기에 선정이 다 성취가 돼가지고 바로 이제 되는 거죠.
그런데 그것도 뭐 경 보라 그러면 경 보나요? 누가 안 봐요 안 볼 줄 뻔히 알면서도 또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그 말을 안 하면 제 자신도 소임을 안 하는 거거든. 이게 이거 이야기하는 것도 소임인데 안 하는 거지. 그래서 사람에게는 나 이 불교를 만나면 출신 활로가 있다.
출신 활로가 뭐냐? 법화경 비유품에 보면 일체 중생이 화택 동자여.
일체 중생이 지금 불타는 속에서 뛰놀고 있는 어린아이여.
그래서 지금은 불이 방 안에까지 안 들어와서 안 보이니까 애들이 철없이 뛰어놀지만
이제 언제 이게 불이 들어와서 석가래도 무너지고 기둥도 무너지고 타서 죽을지 몰라요.
삼계가 화택인데 일체중생이 화택동자락이 이 무상과 고통을 면할 길은 전혀 없어요.
무슨 짓을 해봐도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뭐 많이 이루려고 설치는 놈이 아주 무식한 놈이고 미련한 놈이야. 이뤄봐야 죽는 순간에 아무짝에도 쓰잘때기가 없어요.
그 쓰잘데기 없는 걸 왜 이뤄 미쳤어?
참 내 그 답답해 삼계가 화택이니 일체 중생이 화택 동자라 경에 다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거 딱 보고 제법 전구를 내 상자 적멸상이다. 그러면 제법이 본래부터 해탈상이다. 그럼 해탈상을 바로 경을 통해서 보면 되지 따로 또 할 게 뭐 있나 이거 그래서 이제 이 화택동자와 같은 점점 늙어가고 점점 죽어가는 이 몸이 완전하게 사는 길이 있는데 그걸 출신 활로라고 그랬어요.
출신 활로는 도서에 저요에 있는 말인데 나는 여기다 어떻게 붙였냐 그러면 몸 나갈 큰 길이다.
몸이 모든 생사에서 벗어날 큰 길 못 나갈 큰 길이다.
그러면 우리가 꿈을 꿀 때 그걸 출몽이라고 하는데
꿈에서 벗어날 길이 있는데 꿈을 꾸는 순간에는 꿈에서 벗어날 길을 몰라요.
그런데 꿈을 깨고 보면 그 꿈이라는 게 없었던 걸 아는 거거든요.
꿈이라는 건 없었구나. 그럼 꿈은 어떻게 하면 꿈에서 벗어나냐 아주 간단해요.
잠에서 깨면 꿈이 없어져요.
잠든 상태에서 꿈에서 벗어나려고 그러면 잘 안 돼.
근데 잠만 깨면 꿈은 없어져. 그래서 몽중에 여유 출몽활로하야.
몸에서 꿈에서 벗어날 활로가 있는 거와 같아서 이렇게 되거든.
이렇게 돼 가지고 인간에게 이 출신 활로가 진유 출신 활로 하니 참으로 출신 활로가 있다.
그럼 출신 활로가 뭐냐? 몸이 생사고뇌에서 완전히 벗어날 몸 나갈 출신 활로 활로는 이제 일반 경제학 용어로는 살 길이라고 그래요.
살 길을 찾는다. 근데 이건 살 길이 아니고 큰 길이다.
대로 몸 나갈 대로가 있다 이 소리예요. 그런데 옛날 어른이 활로라고 했으니 그냥 쓰는 게 맞아요.
몸 나갈 큰 길이 있으니 그게 뭐냐 하면 일념 공부다.
생사가 어디서 나겠느냐 망념에서 나왔기 때문에 망념만 없어지면 해탈이에요.
잠만 깨면 꿈 없어지듯이 망념만 없어지면 해탈이요.
그럼 망념을 어떻게 없애냐 마음 공부하면 돼요. 이것이 무엇인고 한다든지 경 보면 돼요.
경을 딱 보면 망상은 없어지고 지혜가 밝아져 기도하면 돼요.
기도하는 동안에 거기에 선정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다 생겨요.
오늘 이야기 끝.
https://www.youtube.com/watch?v=3qtSYKnpMdQ
[정리]
諸惡莫作 衆善奉行제악막작 중선봉행
自淨其意 是諸佛敎자정기의 시제불교
모든 악을 그치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칠불통게-
악한 생각.행동은모든 생명에 고통 안겨 선한 마음으로 살면 자유롭고 행복해져
이 구절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의 게송이다.
매우 단순하고 쉽기 때문에 심오한 불교의 가르침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상에서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는 일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더구나 늘 마음을 살피고 청정한 자리를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이 경구는 실천과 의미와 체험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심오한 것이며 우리 인생의 출발이자 궁극이라 할 수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수행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수행자가 있다. 첫째는 몸과 마음으로 탐욕을 행하는 사람, 둘째는 몸으로는 탐욕을 행하지 않지만 마음에 탐욕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셋째는 몸과 마음에 탐욕을 떠난 사람이다.
나는 몸과 마음의 탐욕을 떠나 수행하리라.” 탐욕과 같이 악한 요소를 아예 멀리하고 정신적 성숙과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겠다는 다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말한다.
모든 생명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결과가 선이다.
살인.절도.사음.거짓말은 생명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기 때문에 계율의 중요 항목이다.
몸과 언어와 생각으로 짓는 열 가지 악업은 탐진치 삼독이 모태가 된다.
그리고 탐욕.성냄과 미움.어리석은 소견.교만.의심은 수행의 주요한 장애가 된다.
때문에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일은 이웃에게는 행복을,
자신에게는 참됨과 당당함의 위상을 심어준다.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은 언행과 생각에서 악을 그치고 선을 자라나게 하면서, 늘 순간 순간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고 가꾸는 일이다.
마음에 악한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야 마침내 자유롭고 행복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마음 수행을 강조한다.
법인 스님 대흥사 수련원장[불교신문 1998호/ 1월16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내 생각]
종범스님의 법문은 듣는것을 다시 한번 적어보면서 그 뜻을 음미하면 너무 좋다.
종범스님 격하게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부디 보리심으로 모든 일을 할수 있게 마음을 쓸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경을 공부하고 좌선을 하고 명상을하고 염불을 외우는 모든 것이
현재 삼세가 한 순간 일 찰나임을 명심하고 순간순간 일체 화엄의 눈으로 보고 행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