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불교

종범스님 지눌스님 마음닦는 법문

이것이 무엇인가 2022. 6. 12.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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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목우자 지눌스님이 생각하시기에 왜 중생 범부가 마음을 못 닦는가 몸에만 의지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몸에만 몸에만 집착하고 생각이 몸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마음을 못 닦는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지눌스님의 여러 군데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이 산다는 거는 내가 사는데 내가 또 나를 위해서 사는데 그 나라는 느낌이 범부가 느끼는 나 보살이 느끼는 나 재불이 느끼는 나 이렇게 달라요. 그럼 범부가 느끼는 나는 뭐냐 신상하라고 그래서 몸 신자 형상 상자 이 신상 이걸 나라고 그래요 그런데 보조스님 말씀에 이 신상은 인연 연자 형상 상자 연상이다. 이 몸은 인연으로 생겼다가 인연으로 사라지는 게 몸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몸에만 집착하면 허망하게 되고 무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닦아야 된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러면 신상은 뭐냐 신상은 연상인데 제법 공상이라고 하는 그 상자 있잖아요. 서로 상자 그럼 연상은 뭔가 온 신상은 우리 몸을 12연기에서는 명색신이라 그러고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라고 그러는데요. 색 수상행식을 오온이라고 그러잖아요. 4대 수상행식 생각 이게 몸인데 이 오온 신상은 연합 희생이라 인연 연자 합팔 합자 인연이 모이면 보일 시 날생이 태어나는 걸 보여요 전부 인연으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이는 거죠. 이게 연합 시생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연진하면 인연이 다 하면 또 시멸을 해요. 없어질 멸 사라지는 것도 보여요 그래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인연에 의해서 놨다가 인연에 의해서 사라지는 난 거예요. 그럼 인연에 의해서 사라질 때 어떻게 사라지냐 화풍이 선거라고 화 풍 바람풍인데요. 바람풍은 호흡이에요. 호흡과 화는 불 화자인데 체온이 제일 먼저 가요. 또 지수가 후고하고 지 뼈 있죠 수 혈액 물 지수는 뒤에 가요. 제일 뒤에까지 남아있는 게 뼈거든요. 이게 가는 거예요. 제일 먼저 숨이 가고 체온 가고 혈액 가고 골절까지 다 흙이 돼 버리면 이제 가버려 그래도 뭐가 남나 종무일진이라 마침내 한 티끌도 없다. 그게 사는 거예요.

 

그래서 신상은 무상하다 이 몸의 모습은 항상함이 없는 거예요. 신상은 무상하니 홀생홀멸이라 그냥 갑자기 홀연이 생겼다가 홀연이 사라진다. 이러니 여기에만 의지하고 여기에만 집착해서 산다는 게 그게 얼마나 허망한 삶이냐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신상은 허망하니 몸의 모습은 허망하니 얼마나 허망한가 몽환포영이라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그렇다고 가르쳐요 그래서 이렇게 몸에 대한 것이 허망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못 느끼면 마음 공부는 못해요. 그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또 늦겠다. 하더라도 잠시 느꼈다가 다시 집착을 하니까 마음 공부 안 하는 거예요. 석가모니는 아주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이 신체의 무상성과 허망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이 마음 공부를 포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몸이 전부냐 그게 아니라 이 보살서부터는 마음 심 성품성 성품성 이 심성이 있다는 걸 믿게 돼요. 심성 신상은 이렇게 허망하고 무상한 건데 이 마음에는 몸에는 마음이 있는데 그 힘성은 또 있다. 그래서 그 심성은 허망하고 무사한 게 아니라 고요적 비칠조 찾아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눈으로 뭘 보는데 그런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고 다 해요. 이걸 비칠조 조명이라는 조자 조라고 그래요 이게 이게 적조라고 그래요 그래서 심성은 적조요 신상은 연상이다. 그래서 이 고요한 데 찾아보면 없는데 항상 비추는 그 마음을 찾는 게 그게 마음 공부다 이거예요. 그거 찾는 게 마음 공부예요. 그 적조 심성을 마음 공부라는 건 다른 거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찾는 게 마음 공부예요. 고요히 비추고 비추면서 고요한 그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보고 그 마음을 쓴단 말이지 그래서 왜 심성이라고 그러냐 이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 심자하고 감정이라는 정자를 써서 심정이 있는데요. 심정 심정이라는 것은 육정인데 눈으로 보면 그 보는 대상에 감정이 일어나요. 이걸 이걸 정이라 그래요 또 귀로 들으면 그 듣는 대상에 정이 생겨요. 좋다 나쁘다 이런 정이 그래서 안이비 설신의 여섯 가지 육정이 있는데 육근에 모두 정이 일어난다고 그래가지고 이걸 육정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이 대상에서 일어난 마음을 육정심이라 이렇게 하거든요. 육정심 요게 정심이에요. 근데 성심은 그 정심의 본성이 된다. 성 일체 심이라 이거 능경에서 가르치는데 일체 정심의 본성이 된다. 이거죠. 그래서 성심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감정의 그 본성이 되는 마음이 있다. 이거야 근데 우리가 아는 건 정신뿐이에요. 그래서 정심이라는 것은 늘 밖에서 느끼는 감정의 마음이기 때문에 항상 밖으로 돌아만 다니고 그 성의 본성이 되는 성심은 느끼질 못해요. 그래서 그 성심을 봐라 이게 견성이에요. 그 성심을 알아라 이게 식심이에요. 알식자 마음 심자 거기서 성심을 알아라 하는 것은 그 식심 그 마음 자체가 본성심을 알아라는 거지 이 정심을 알아라는 게 아니에요. 정심 성심을 알아라 이거거든요. 그래서 식심 그러면은 그 성심을 알아라 근데 이제 마음 그러면은 정심과 성심이 있다. 정심은 우리가 항상 감정의 마음이요. 인간 범부는 감정으로 살아가거든요. 근데 보살은 그 성심을 봐요 이걸 조견이라고 그래요. 그 범부는 정심을 쫓아가고 보살은 성심을 조견해요. 조견해 제물은 그 성심을 자제해요. 성심 속에서 그냥 있는 거예요. 자제 이거를 방광이라고 그러고 광명이라고 그러고 이 빛을 바란다라는 건 그 성심 광명이 늘 밖으로 나오는 거거든요. 이렇게 돼요. 그래서 성심을 이야기를 어떻게 하냐 이거 성심을 일체 감정의 마음의 본성이라 그래가지고 심성이라고 그런다고요 그래서 이 심성은 적조다. 찾아보면 한 물건도 없는데 공공적적한데 늘 소소영령하게 항상 비춰요. 그래서 적조가 함호공이라 적조가 허공을 다 삼킨다 적조보다 더 큰 게 없고요 적조보다 더 먼저 생긴 게 없고요 적조보다 더 오래 가는 게 없어요. 이게 우리의 성심인 거예요. 글쎄 이걸 찾으면 감정의 마음으로 근심 걱정하는 건 온데간데 없어요. 그게 견성이에요. 그래서 이 심성은 묘체인데 묘할 묘자 몸체자 우리 몸은 신체인데 그 몸 안에는 묘체가 있다. 이 심성 묘체는 무주 원명하다고 가르쳐요 머무는 데가 없이 둥글고 밝다 이 심성 묘체는 하늘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땅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어디 한 군데 일정하게 머무는 게 아니에요. 머무는 데가 없어요. 이걸 무주라고 그래요 그리고 둥굴굴 밝아 끝없이 밝아요. 성성적적하고 깨 성자 밝은 성자가 밝고 밝고 고요하고 고요하고 적적 성성이라 고요하고 고요하고 밝고 밝다 이게 우리의 성심이에요. 적이 상조하고 고요하지만 항상 비추고 조의 상적이라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다.

 

그래서 이 적조 대용이 고요히 비추고 비추대 고요한 이 큰 작용이 큰 대 자 쓰용 자인데 이 큰 대용이라는 건 오직 그거밖에 없는 이 말이죠. 대용이라는 건 그거밖에 없는 작용이 무시현현이라 없을 묻자 떼시자 때가 없어요. 이거는 과거에만 있는 게 아니고 현재에만 있는 게 아니고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고 그냥 때가 없이 나타나요. 현현이에요. 나타날 현자 나타날 현자 무시현현이에요 이걸 보는 게 견성이에요. 마음 닦는다라는 건 그걸 보는 일이지. 무슨 행동을 하는 게 아니고 뭘 만들어가는 게 아니고 뭘 배워 익히는 게 아니에요. 그거 보는 걸 수심이라고 그래요 이걸 이제 가르치는 거거든요. 그래서 여기 이 보조스님의 이 수심결 여기 본문이 전부 그런 본문인데요. 여기 이제 본문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여기 불식 자심이면 안 된다. 자기 성심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냐 종종 고행이 자기 성심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애쓰는 걸 이걸 종종 고행이라고 그러는데 가지가지 괴로운 행위 익자로이라 더욱 스스로 피로하게 할 뿐이다. 이랬어요. 성심을 아는 게 이렇게 중요해 자기 성심을 모르고 막 온갖 애를 쓰고 하는 거는 더욱 자신을 그냥 노곤하게 만들고 피로하게 만든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뭐 알지 못하고 애쓰는 게 아주 고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 없이 부지런한 부모 밑에 있는 자식들은 고생 많이 해요. 아주 자기 혼자 고생하는 건 괜찮은데 자식까지 그냥 고생시키거든 아주 그런 사장 밑에 있는 사원들도 아주 헛 고생 많이 해요. 안 되는 일에 그냥 계속 매달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단식 자심이면 다만 자기 성심을 알면 무량묘의가 한량 없는 묘한 뜻이 불구 이득이라 구하지 아니하는데 얻어진다. 그러면 이 무량묘의라는 게 뭐냐 하면 부처님에게는 지비원신이 있는데 지혜 자비 원력 신통 이게 부처님이에요. 지비원신 신통력 신통 그런데 지라는 게 이게 지혜 지자라는 게 뭐냐 그러면 성심을 본 마음을 지혜라고 그래요 감정에 쫓아가는 마음을 식심이라고 그러고 알식자 마음 심자 그래서 이 성심을 또 보면 거기서 이제 지혜가 생기는데 그 성심을 오직 보게 되면 자비 원력 신통이 저절로 생기는 거예요. 단식 자심이면 무량묘의가 불구이득이라 무량묘의가 구하지 아니하는데 얻어진다.

 

자기 성심을 보면 자비가 저절로 생기는 거예요. 원력이 저절로 생기고 심통이 저절로 생겨요. 뭐 얻으려고 그래서 얻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이렇게 가르치는 게 목우자 지눌스님의 마음 닦는 본문이에요. 그래서 중생은 정심으로만 사니까 보는 대로 대상에 쫓아가요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대상에 쫓아가는데 그걸 어려운 말로 업식이라고 그래요 업식 업이라는 게 이 보는 대상에 쫓아가는 감정의 마음이 그게 업이거든요. 그래서 익힌 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업이에요. 그 업식이 다 다른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친한 사람도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모이면 싸우게 돼 있어요. 한 시간을 설명을 해도 다 듣고 나서는 그건 아니고 해버리면 끝나는 거예요. 아주 미치는 거죠. 왜 그러냐면 업은 익힌 건데 익힌 인식이 달라서 동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업식이라는 말을 불교에서 쓰는 거예요. 업은 익힌 거예요. 이 학습한 경험한 인식이 다르니까 이게 업식이 다르다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범부 업식이라는 거는 항상 대상에 쫓아가니까 몸에 쫓아가고 사람에 쫓아가고 물질에 쫓아가고 거기만 돌아다니는 거예요. 몸 생각 사람 생각 물질 생각 그것 뿐이에요. 그러면 이 몸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냐 4대는 이렇게 다 가잖아요. 화풍은 선거하고 화와 풍은 먼저 가고 지수는 후거하고 뼈와 혈액은 뒤에 가고 가는데 그렇게 쫓아다니던 수상행식은 또 다른 데 또 가요 이게 이제 내새의 몸을 또 받는다 이거예요. 지수화풍은 사라지는데 수상행식은 또 다른 데로 옮겨가요 그래서 끝도 한도 없다. 이 말이죠. 수상행식이 옮겨가는 거는 이게 업식이 이게 해탈하기 전까지는 계속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마음을 하나 다 닦으면 끝나요. 생사는 끝나고 신통이 자제하다 이거거든 그러니까 마음을 닦아야 된대 그럼 이 성심이라는 게 이 몸 떠나 있느냐 아니에요. 몸에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 닦기 쉬운 게 이 마음 닦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바다에 가서 고기 잡으래도 고기가 어디 있는지 잘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거 그물을 아주 잘 쳐야 자꾸 안 그러면 못 잡는데 또 산에 가서 금을 캘라도 산 밑에 요 흙 밑에 금이 있는지 없는지 잘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 마음이라는 건 몸 안에 있으니 금 캐는 것보다도 쉽고 고기 잡는 것보다도 쉽고 이게 세상 쉬운 게 이거 마음 닦는 거다. 이거예요. 이렇게 가르쳐요 이 안에 있단 말이야 있는 거 보고 왜 못 알아챘냐 이거죠. 있는 거 왜 못 잡아내냐 이거거든 그러면 이제 마음을 어떻게 가르치냐 수심결에 여기 한 법문인데 뭐 아는 게 이게 성심이다. 이게 아는 게 그럼 왜 그러냐 그러면 사대가 불해 설법 창법하고 사대 우리 지수화풍 몸이잖아요. 이 사대가 설법을 하거나 청법을 하거나 그거 모른다 이거예요. 또 허공이 불해 설법 청법하고 이 몸이 아닌 저 허공이 법을 듣거나 법을 말하거나 그거 할 줄 모른다 이거지

 

지여 목전에 오직 눈앞에 눈 뜨면 귀 열면 항상 보이는 눈앞에 역역 고명이라 아주 분명하고 분명하고 홀로 밝아 이로울 꽃자 밝은 명자 그런데 영역 고명한데 물 형단자라 형상이라는 형하고 조각 단자가 있는데요. 분단이라고 이건 다 형상이 있는 걸 형단이라고 그러는데 형상이 없어 역역 고명한데 물형단자요 (분명하고 분명하고 홀로밝은 형상이 없는 그것) 형단이 아닌 놈자자 그것 형단이 아닌 그것이다. 역역 고명 물형단자 이걸 마음이라고 그러는데 이게 적조거든요. 고요히 비추는 거거든 그거 알면 돼요 영역 고명 안 돼 물 형 단자 그거 적이 상조하고 고요하지만 항상 비추고 조이 상적이라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다 그거 알면 그게 우리 마음인데 그거는 무시 현현이라 시간 역사 없이 항상 나타나니까 이 생노병사라는 거는 몽중사의 꿈속의 일이요.

 

그러니까 이제 아무리 이런 말 해도 몸에 집착이 꽉 들어 있으니 이 몸 집착하다가 세월 다 가는 거죠. 그 다음엔 또 딴 데 딴 몸 또 찾아가고 근데 요즘에는 애도 안 낳아서 어머니 만나기도 힘들어요. 죽는다고 다 금방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어요. 왜 애를 안 낳는데 한국에서 죽는 사람이 한국에 태어난다는 보장이 있어요. 할머니 어머니보다 앞으로 미래 어머니가 더 없는데 어떻게 태어날 거예요. 그것도 보통 일 아니에요. 그게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다 하지 참 이렇게 역역고명한데 물형단자 형단이 아닌 것 이것이 시해 설법청법 하나이라 (분명하고 분명하고 홀로 밝은 형상이 없는 그것이 법을 설하고 들을 줄 안다.) 

 

설법 청법할 줄을 비로소 아하니라 이 법문이 임재선사 법문인데 목우자 지눌스님이 수심결에 딱 갖다 놨어요. 그러니까 우리 몸에는 사대가 있는데 이 사대가 피가 아니면 뼈가 설법청법할 줄 모른다 또 허공이 설법청법 할 줄 모른다 그러면 말하는 거 듣는 거 움직이는 거 이게 전부가 다 심성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마음의 본성이라고 그럴 때 심성이고 아는 본성이라고 그럴 때 이걸 불성이라고 그래요 불은 자기를 안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 불성은 말하는 게 불성이고 말 듣는 게 불성이고 움직이는 게 불성인데 이거 맨날 보고 듣고 움직이면서도 스스로 모를 뿐이다. 왜 감정에만 쫓아가니까 바로 이거예요. 쫓아가지 않고 보기만 하면 금방 아는 거예요. 아 이거 참 문제네 이게 근데 안 보고 쫓아만 가니까 못 보지 안 쫓아가고 보면 금방 안다. 이걸 찰나 성불이라고 그래요 찰나의 앎을 이룬다고 이게 마음 공부예요. 그래서 이 수심결에서 이 마음 공부에 대한 본문을 견성과 정혼을 중심으로 말을 한 법문이 있는데 정신이란 정자 혼이라는 혼자를 정혼이라고 그러는데 정호는 정심을 말해요. 정심 감정의 마음을 말해요. 정신 그러면 이게 생겼다. 없어지는 게 정신이고요 그러면 생겼다. 없어지는 게 혼인데 혼비백산이라고 그래요 혼이 날아가버려 오래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럼 구멍 나요. 혼구멍 낸다고 혼구멍 내면 날아간다. 소리요 그러고 정이라는 게 그게 너인데 우리 말로 넋 빠졌다. 넋 나갔다. 이러잖아요. 이게 다 생겼다.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감정의 마음 불교식으로 말로 하면 정심이에요. 정혼만 알지 정신만 알지 불성 심성을 모르는데 근데 실제로 이 움직이는 건 전부가 이 심성이 움직이는 건데 본부들은 그 감정의 마음 영혼이 움직이는 걸로 안다 이걸 딱 구분해서 본문한 게 있어요. 그 본문이 이제 뭐냐 하면 어떤 왕이 수행자 선지식을 찾아가서 물어요. 뭐라고 묻느냐 그러면 이게 이쪽이 됐나

 

하자가 시불이있고 부처는 뭐냐 이래요 선지식을 찾아와서 그러니까 선지식이 말하기를 견성이 시불이라 그 심성을 본 것이 부처다 심성을 보면 부처고 심성을 못 보면 범부다 이거야 이거는 경덕전등록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거 제3권에 있는 본문을 이 목우자 스님이 여기다가 인용을 한 거예요. 경덕전등록 제3권에 그러니까 그 왕이 선지식한테 그러면 선지식은 견성을 했느냐 묻거든요. 그러니까 선지식이 말하기를 나는 그 불성을 봤다. 견성을 했다. 이거예요. 그러면 왕이 말하기를 성재 하처 불성이 어느 곳에 있느냐 그러니까 성재 작용이다. 그 불성은 작용에 있다. 작용 나는 작용을 하는데 왜 나를 못 보냐 스스로 작용하지만 스스로 못 볼 뿐이다. 이게 그럼 더 자세히 말해주시오 그러니까 작용이 나타나는 것은 크게 보면  당유기팔이라 그 여덟 군데가 있다. 작용으로 나타나는 걸 크게 보면 그럼 여덟 군데는 뭐냐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 불성의 작용이 태중에 있을 때는 어머니 모태에 있을 때는 그걸 몸이라고 한다 불성 작용이 태중에 머물 때는 그걸 몸이라고 그러고 처세왈인이요 세상에 머물 때는 건 사람이라고 하고 제안왈견이요 눈에 있을 때는 본다고 하고 또 재이왈문이요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고 하고 그러니까 이게 왜 어머니 태중에도 들어가고 세상에도 나오고 보고 듣는 게 전부 불성이다. 이 말이여

 

이 몸은 4대요 몸 밖에는 허공인데 허공이 보고 듣는 게 아니고 지수화풍 사대가 보고 듣는 게 아니라 심성 묘체 찾으면 없지만 항상 광명을 일으키는 그 심성 요체 불성 심성이 그렇게 하는 거다. 이게 법문이에요. 그다음에 제설활담론이요 혀에 있으면 불성 작용이 그 담론한다고 그런다 말씀 담 논할론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 말이죠. 재수할 집착이요 손에 있을 때는 잡을 집 잡을 착 뭘 잡는다고 한다 이거지 제족 운분이라 발에 있을 때는 돌아다닌다고 한다 운전할 움직이는 운자 있잖아요. 또 달릴 뿐 운분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보고 듣고 손으로 잡고 말하고 움직이는 게 전부 이게 불성 작용이다. 이거예요. 이게 지수화풍이 하는 것도 아니고 허공이 하는 것도 아니고 불성 작용이 하는 거다. 그래서 이 불성은 펼치면 포함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이걸 거두면 보이는 것이 없다. 하도 작아서 작으러 들면 불성보다 더 작은 게 없고 크러들면 불성보다 더 큰 게 없다. 이거지 적조 기 때문에 그래요 고요하면서 형단이 아니면서 역역 고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가지고 식자는 아는 이는 지시불성이오 이것이 불성인 줄 아는데 불식자는 알지 못하는 이는 환자 정혼이라 정혼이라고 부른다 넋이다. 또 혼이다. 넋나가고 혼나가고 이거는 이 몸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이게 정혼이에요. 몸 없는 정신이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 말에 혼비백산 아니라 혼이 날아갔다. 혼 구멍 낸다. 그냥 혼을 없애버린다니까 구멍 낸다고 그러고 넋이 빠졌다. 넋이 나갔다. 우리 말 그런 말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정혼을 말하는 거예요. 그거는 인연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이거는 정심이고 이 성심은 이렇게 거두면 보이지도 않게 작고 펼치면 온 우주 법계를 감싸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그게 우리 몸속에 항상 있어서 손으로도 작용을 하고 눈으로도 작용을 하고 발로도 작용을 하고 혀로도 작용을 하는데 오직 모를 뿐이다. 그래서 그거 아는 게 마음 닦는 거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마음 공부 잘 합시다

 

그때는 불성이 어디 있느냐 불성이 작용에 있다. 그런 본문을 했고요 오늘은 또 거기에 이어서 불성에 대한 법문을 하고 계십니다. 어떤 본문이냐면 중국 당나라 시대에 돌아갈 기자 종교라는 종자 기종 대선사가 계셨는데 그 귀종대선사한테 마음 공부하는 학승이 찾아가서 질문을 하기를 여하시불인 있고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이렇게 물으세요. 왜 불에 대한 질문을 하냐면 경에서 비로자나불을 말씀하시고 노사나불을 말씀하시고 석가모니 불을 말씀하시고 아미타불을 말씀하시고 또 부동존불 동요가 없는 높은 부처님 부동존불을 말씀하시고 또 대웅불 크게 웅장한 부처님 대력불 큰 힘을 나타내시는 부처님 대비불 대자비를 실행하시는 부처님 이렇게 부처님을 종종 명으로 종종 불력으로 말씀을 하시니까 과연 부처가 뭐냐 부처님이 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마음 공부하는 사람은 여하시 불인 이고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이런 질문을 반드시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질문을 받고 귀종선사가 아금의 내가 지금 항여도 하려 하노니 그대를 향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데 공려 불신 하노라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 학생이 말하기를 화상 성언을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실한 말씀을 언감 불신이 있고 어찌 감히 믿지를 않겠습니까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사운노대 귀종선사가 이르대 즉여시라 곧 즉자 너 여자 이 시자 곧 너희다 이 시자는 이다라는 조사인데요. 곧 너희다 너희다라는 거는 토시니까 우리 말로 하면 바로 너다 이런 얘기죠 즉 여시 바로 너다 바로 내가 부처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앞에 그대가 믿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그랬는데 큰스님의 진실한 말씀을 어찌 안 믿겠습니까 이렇게 다짐까지 한 터라 바로 내가 부처다 바로 너다 이런 말을 듣고 차마 못 믿겠습니다라는 말을 못 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올리기를 성운 학승이 이루되 여하 보림이 있고 보림이라고 하는 거는 보존할 보자 맡을 림자 이걸 보존해서 잘 지키는 걸 보림이라고 그러는데요. 내가 붙으면 나를 어떻게 잘 보존하고 어떻게 잘 지키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선사가 이르기를 사운 인류의 제안이면 공화가 난추니라 한 가림이 눈가림이 한 가림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나니라 이런 법문을 하시니까 그 학생이 그 말을 듣고 언하에 유성하니라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깨달았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언하의 유성이라 말씀은 자 아래 한자인데 그건 그 말하는 그 순간에 이 소리고 있을유자 살필 성자인데 여기서 살필 성자는 깨달을 성자라고 하는데요.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이루었다.

 

깨달음이 있었다. 이 법문인데요. 그러면 이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본문인가 바로 내가 부처다라고 하면 보통 그 학생이 나라고 했을 때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나라고 하면 첫째는 인연 소생 4 대 5분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해서 온갖 인연으로 태어난 바 지수 화풍 사대 색수상까지 합해서 온 이걸 나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틀림없이 나거든요. 인연 소생 사대 오온인데 이 나는 삼세 인과 속에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 이 몸은 삼세 인과를 벗어나지 못해요. 사대 오온은 삼세 인과 이게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나란 말이에요. 그런데 경전에서 가르치는 나는 진여불성 이 사대 오온 속에는 진여불성이 있어요. 참 그대로 부처님 성품 진여불성 청정법신 일체중생의 몸에는 청정법신이 있어요. 그거는 대적광명이라 큰 대자 고요 적자 온전히 고요하다 이게 대적인데 하늘에도 자취가 없고 땅에도 없고 사람에게도 온전히 자치가 없어요. 이게 대적에 그런데 항상 광명을 비추니 이게 대적광명이에요. 진여불성 청정법신 대적광명 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이제 알기로는 인연 소생 사대 오온 삼세인과가 이런데 이분이 지금 말씀하시는 거 그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너다 이랬어요. 너다 그러면 진여불성에 네가 너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사대 오온의 네가 바로 부처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바로 너다 그러면 여기는 사대 오군이나 진여 불성을 가리지 않고 바로 나의 실체를 지금 딱 지적한 거죠. 바로 너의 실상 너의 진실상이 바로 부처다. 그러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그걸 잊어버리지 않고 잘 보존해서 지키겠습니까 이러니까 일례가 재안에 한 일자 가릴 례자가 있는데 한 가림이 눈에 있으면 공화가 난추라 허공이 본래 꽃이 없고 맑은데 허공 꽃이 어지럽게 떨어진다. 이랬거든요. 그러면 허공 꽃이 왜 보이느냐 눈에 가린 게 있어서 보인다. 그러면 생로병사라든지 이 색상 차별 보이는 모습 색상이라고 그러는데 이 색상 차별 또 흥망 성세가 이게 어디서 왔느냐 중생의 미혹에서 왔다. 이게 불교의 가르침이에요. 생노병사 색상 차별이 색상 차별을 산하 대지 명암 색공이라고도 해요. 산하 대지 명암 밝고 어둡고 색이고 공이고 이런 전체가 어디서 왔는가

 

범부 미혹에서 왔다. 범부가 진여불성 청정법신을 알지 못하는 미혹에서 왔다. 그렇게 가르치는 게 경의 가르침인데 여기서는 바로 비유로 눈에 하나의 가림이 있으면 맑은 허공에서 허공 꽃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허군꽃이 어디서 왔느냐 그 눈에 눈병에서 왔다. 이 말이거든요. 생노병사가 어디서 왔느냐 한 생각 미혹에서 왔다. 이 말이야 이걸 가르쳐요 그래서 한 생각을 막혀서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게 있는데 그걸 정의라고 그러는데 이렇게 정이 깊어지고 깊어지고 깊어지면 마음이 환해져요. 그 마음이 환해진 걸 지혜라고 그래요 그래가 정도 이루어지고 해도 이루어지면 정해가 이루어지면 그게 마음 공부인데 그러면 불속만 온전하고 생산은 없다. 이게 마음 공부예요. 불성이 온전하고 생산은 없다. 그러면 허공에 꽃을 보던 사람이 눈병이 깨끗하게 나오면 허공 꽃은 없거든요. 오로지 맑은 허공뿐이단 말이지 근데 눈병이라는 게 과연 뭐냐 하나의 삼눈이 서면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 삼눈이라는 게 옛날에 눈에 삼 섰다고 젊은 분들은 전혀 모르고요 옛날에 영양 상태가 안 좋아서 눈에 가끔 좁쌀만한 빨간 피가 맺혔어요. 그걸 삼 섰다고 그러고 그 삼선 눈을 삼눈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거를 안과에 간다든지 이래 안 하고 삼눈 잡는다고 또 물 물 그릇에다가 그릇에다 물을 담아서 팥을 던지면 그 팥에 거품이 거기 좁쌀만 하게 생겨요. 그러면 그걸 바늘로 꼭 집어줘야 돼 그게 삼잡는다고 그래요 여기 계신 분들 이 방송 들으신 분들은 그거 모르는 분 많을 건데 그 삼눈이라는 게 눈에 좁쌀만하게 핏발 서는 걸 말이에요. 그래 삽눈이 생기면 눈이 따갑고 안 보여서 허공에 꽃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전부 안질이에요. 안질 그리고 눈에 병이 나면 달을 보는데 달 옆에 달이 하나 더 있어요. 그걸 제이월이라고 그래요 제이월 그러면 우리가 이 생사를 느끼는 게 삼눈에 의해서 허공에 꽃 피는 꽃 보는 거와 같고 이 눈병에 의해서 달 옆에 달을 하나 더 보는 거와 같다. 그래서 마음을 닦는데 마음을 닦을 때는 무조건 마음을 그쳐야 돼요 그다음에 마음을 딱 그치면 그다음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딱 정해 들어요. 이걸 선정이라고 그러는데 지우의 초정이라 그치는 거는 이 선정에 처음이 되는 거예요. 그치지 않고는 선정에 못 들어가요 그치면 선정에 들어가요 그치는 거는 정혜 처음이다 그 다음에는 이것저것 경계를 쫓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보는 거예요. 딱 이렇게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보기만 해요. 그걸 관이라고 그러는데 볼 관자 그 관의 초해라 이렇게 딱 보기만 하는 것은 눈도 감지도 않고 평상으로 눈을 뜨고 봐요 그쳐서 봐 그치고 보면 마음이 탁 정해지는 선정이 이루어지고 또 환히 밝아지는 지혜가 이루어져서 관의 초해라 과는 처음. 지혜다 그렇게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물과 같아서 물이 본래 맑은데 거기다가 막 먼지도 집어넣고 흙도 집어넣으면 물이 이게 꺼멓게 보이고 막 탁하게 보인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탁한 물을 맑히는 방법은 다른 방법은 하나도 없어요. 그 물을 가만히 두는 거예요. 그걸 젖어도 그걸 마칠 수가 없고 흔들어도 마칠 수가 없고 막 이리저리 가지고 옮겨 다녀도 안 되고 그냥 가만히 놔두면 그 먼지는 싹 가라앉고 맑을 물만 그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게 마음 닦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마음 하나 닦으면 생사와 이 괴로움과 즐거움과 여러 가지 고통과 공포가 허공의 꽃과 같고 달 옆에 달 하나 더 보는 거와 같다. 그게 마음 공부 대적광명이거든요. 대적광명이 돼요. 크게 고요한 광명이 돼요. 그런 법문인데 이건 이제 여기에 인용된 법문은 그러하고 이 법문이 처음에 어디에 수록된 것인가 하면은 경덕전등록이 있는데 1004년에 저술된 전등록인데 고승들의 역사거든요. 거기에는 더 자세히 나와 있어요. 영훈 선사라고 나와 있는데 학승의 이름이 실력 영자 가르칠 훈자 영훈 선사가 이 귀종선사한테 가서 어떤 게 부처입니까 하니까 바로 내가 부처다 이런 법문을 듣고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제 다른 데로 가려고 하니까 귀종선사가 그때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길 떠나는 준비를 해놓고 그걸 행장을 꾸린다고 그래요 행장 길단하는 행장을 쌓아놓고 나한테 와라 그러면 내가 여기 뭐라고 돼 있느냐 그러면 위자 설 일상 불법 의자 당신을 위해서 일상이라는 말은 한 일자 일상자인데 한 번 불법을 한 번 말해주겠다. 그 길 떠나기 전에 짐 싸놓고 나한테 와라 이거야 그러니까 정말로 짐을 싸놓고 그 귀종선사한테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이제 떠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 그 기정선사가 영운 학승에게 불법을 말해준다고 했는데 뭔 말씀을 했느냐 하면은 가까이 와라 이랬어요. 저 멀리 떨어져 있지 말고 가까이 와라 근전내 하라 이렇게 가까이 다 갔어요. 가니까 시한하니 때 시자 차 한자 지금 날씨가 차가우니 도중에 가는 도중에 선위하라 착할 선자 하위자 잘 해라 시한 도중 선위 이렇게 기록이 됐는데 우리 말로 하면 지금 날씨가 차니까 가는 도중에 조심해서 잘 가세요. 이 말 한 거예요. 처음에는 나한테 와라 불법을 말해 주겠다. 이랬거든요. 근데 막상 가니까 가까이 와라 그래서 가니까 지금 날씨가 차니까 가는 도중에 조심하십시오 그 말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과 이 영혼 선사가 영차 일언하고 이 한 말씀을 듣고 돈망전해라 전에 내가 바로 부처다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하고 생각했던 견해가 싹 다 없어졌어요. 이게 또 마음 공부예요. 경에서는 신통을 말할 때 현상신통을 많이 말해요. 구름 모양을 보인다든지 광명 모양을 보인다든지 그 구름을 부처님이 타고 광명을 나타내는 그런 게 열의 현상이라고 나타낼 현자 상이라고 하는 서로 상자 이 현상이라고 그러는데 이게 현상 신통이에요. 그런데 이 마음 공부하는 이 분상에서는 일용신통 신통은 막 신비롭게 통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 신비롭게 통하는 게 일용 날일자 쓸용 자 매일같이 날이 몇 날마다 하는 일에서 신통이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걸음 걷는 것도 신통이고 눈으로 보는 것도 신통이고 귀로 듣는 것도 신통이고 숨 쉬는 것도 신통이고 이게 일용 신통이에요. 그래서 내가 바로 부처다 하고 있을 때는 거기에 견해가 남아 있었는데 날씨가 차니 가는 길에 조심하세요 하는 그 말을 딱 듣는 순간에 그 견해가 다 없어졌다. 그러니까 신통이 일용 속에서 다 이루어지는 도리를 몸으로 알았다. 이거거든요. 그럼 봐요 이 물 한 잔 마시는 거 이게 얼마나 대단한 신통인지 몰라요 이게 일용이란 말이에요. 만날 하는 거예요. 근데 이게 신통인 줄 모르거든요. 그리고 이 사대 오온이 청정법신인데 이게 사대 오온인 줄만 알지 청정법신인 줄 몰라 사대 오온이 청정법신이요 일용 상사가 맨날 하는 항상스러운 일이 이게 신통광명이다. 이게 마음 공부거든요. 그래서 이런 본문을 우리가 듣고 공부를 해야 되고 오늘 여기에 모셔서 천도에 올리는 조상님들께도 이런 법문 듣고 바로 극락세계 왕생하셔야 됩니다. 마치겠습니다.

 

<내 마음>

몸에 집착하지 말고 항상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고 중생 범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관조하는 마음과 마음을 그치는 식심을 통하여 광명정대하고 적조한 불성을 지켜나가야 할것 같다.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깨달음과 포기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을 마음을 내도록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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