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가는자 [최진석] 정리

2024. 6. 11. 12:24수집/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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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가는 자 - 예스24 (yes24.com)

 

건너가는 자 - 예스24

“익숙한 이곳에 머물러 있는가, 새로운 저곳으로 건너려 하는가?”격변의 시대에 반야심경이 던지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화두철학자 최진석과 함께 읽는 삶의 지침서로서의 반야심경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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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삶의 태도에 관하여 《반야심경》은 정말 거칠게 축약하자면 항상 ‘익숙한 이곳에서 새로운 저곳으로 건너가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의 정수 한 조각, ‘건너가는 태도’에 관해 풀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적인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또 ‘나’라는 개별적인 개체에 매몰되지 않은 채로, 관계의 연속선 상에서 존재하는 ‘나’를 인지할 때, 참된 ‘건너감’으로써 삶의 도약을 이룰 수 있다고요.

세계의 법칙과 《반야심경》 역시 달과 달을 비추는 수면의 관계로 바라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인상 깊은 문장]

당신의 고삐는 무엇인가?

  • 경전이란 자기 소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합니다.
  • 고삐가 내포한 의미를 다른 말로는 철학philosophy 혹은 이상vision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이윤 추구나 정권 획득을 수단으로 삼아 나와 공동체의 진화에 어떤 방식으로 공헌하고자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고삐가 무엇인지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디 로 가는지, 심지어는 말을 타고 있으면서도 말을 왜 탔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인생의 방향을 알 수 없고,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지지부진해지고, 오리무중에 빠지는 이유입니다.

왜 행복하지 않은가?

  •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의 삶은 지지부진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소명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소명은 오로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는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의 온 전체가 원하는 것입니다. 소명은 죽기 전에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것, 그것을 이루지 않고는 찝찝해서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소명을 아는 자는 자신을 아는 자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기란 원래 쉬운 일이 아닙니다. 헤르만 헤세도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라고 말했을 정도 니까요.
  • 반야의 지혜란 단순히 ‘어떤 것’에 대해서 인식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을 넘어, ‘가장 높은 차원에서 세계 자체를 통찰하고 관계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나를 키우는 지혜 (팔정도, 육바라밀)

  • 정견(正見), 올바로 보라.
  • 정사유(正思惟), 올바르게 생각하라.
  • 정어(正語), 올바르게 말하라.
  • 정업(正業), 올바르게 행동하라.
  • 정명(正命), 올바르게 생활하라.
  •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태도로 정진하라.
  • 정념(正念), 올바른 의식을 가져라.
  • 정정(正定), 올바르게 고요함을 유지하라.
  • 육바라밀은 나와 남을 완성하는 길, 즉 건너가기를 하게 하는 보살의 여섯 가지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육바라밀은 반야般若,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 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여섯 가지입니다.
  • 보시 조건 없이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수행입니다.
  • 지계계율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 인욕이란 번뇌를 비롯하여 모든 거슬리는 일과 욕된 일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입니다.
  • 정진이란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을 뜻하지요.
  • 선정은 자기 마음과 정신을 똑바로 지키는 것, 혹은 고요 속에서 똑바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 스스로 하나의 실천행도 되지만, 다섯 가지의 다른 바라밀을 포함하는 대표 바라밀이 반야바라밀(반야 지혜)입니다.

반복의 힘

  • 깨달음에 이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혹은 지적으로 좀 더 진일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규칙을 정해서 부단히 반복해야 합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어떤 묘한 경지는 누가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로 결정됩니다. 계율은 지켰다 안 지켰다 하거나 잠깐 지키다 마는 일이 아닙니다. 평생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 될 때까지.

오온 - 색수상행식

  • 오온개공五蘊皆空, 즉 오온이 모두 공이라는 말입니다. 오온은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의 다섯 가지를 의미합니다. 색은 모든 것입니다. 수는 감각과 느낌을, 상은 생각과 관념을, 행은 의지를, 식은 식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오온이 다 공이다

  • 세계가 공이라는 이론임을 알아서 건너가기를 실천한 것이 아니라, 건너가기를 진실하게 실천해서 세계가 공임을 알았다고 하는 표현에 오래도록 눈길 주시기 바랍니다.

무소유

  • 무소유는 소유적인 태도를 없애라는 말이니, 세계를 자기 뜻대로 정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혹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가깝습니다.
  • 세계가 공이니 바쁜 걸음을 멈추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공이니 굳지 않고 계속 끝까지 걷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에 갇히지 말자고 하는 이유는 상에 갇히면 멈춰서서 굳어가며 쉽게 진부해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탁월한 길

  • 두 변을 여의고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 중간 지점에 설 것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좌우의 대립이 극심하니 좌와 우 사이의 어느 길을 도모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가장 탁월한 길을 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 양극단을 부정하는 까닭은 양극단 사이의 중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양극단으로 치우친 이 상황 자체를 넘어선 탁월함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살려면, 경쟁 구도를 넘어서는 일대 도약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소위 ‘혁신’이라고 합니다. 일대 도약을 감행하는 중심 개념으로 도가에서는 도를 제시하고, 《반야심경》에서는 공을 제시합니다. 경쟁 구도에 갇히고 나면, 각자의 낡은 정체성을 고집하는 일 이외에는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공으로 인식할 때만 혁신적인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금덩어리가 공이기 때문에 황금 사자상으로 변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십이연기와 사성제

  • 하나, 무명. 실상을 모르는 것, 진실을 모르는 것,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는 것. 올바른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 둘, 행. 자신이 지금까지 무지해서 한 행위로 쌓인 업(카르마).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끝나고 나면 바로 사라져버리지 않고, 우리 안에 쌓이고 보존되어 인격으로 형성됩니다.
  • 셋, 식. 쌓은 업으로 만들어진 인격이 의식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됩니다.
  • 넷, 명색. 인식의 주체가 형성되면, 보이지 않는 것 혹은 보이는 것, 정신 혹은 물질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 다섯, 육처. 명색의 단계에 들어서면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감각 기관이 거기에 맞게 작동합니다.
  • 여섯, 촉. 육근, 육경, 육식이 화합하여 십팔계를 형성합니다.
  • 일곱, 수. 육근, 육경, 육식이 화합하면서 감수感受 작용이 일어납니다. 즉 기쁨, 즐거움, 분노, 쾌락 등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 여덟, 애. 무엇인가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집착하는 단계이자, 갈망하고 좋아하는 단계입니
  • 아홉, 취. 애의 단계에서 형성된 갈애渴愛의 결과로 취사선택 합니다.
  • 열, . 취사선택 할 때는 이미 견고한 자기 존재성이 확립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자의식에 따라 미래가 펼쳐집니다.
  • 열하나, 생. 견고하게 확립된 자아에 따라 삶이 펼쳐집니다.
  • 열둘, 노사. 태어났기에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생겨난 관념들이나 ‘나’라는 주체성도 결국은 낡고 죽습니다. 여기서 모든 존재가 늙고 죽는 고통 속에서 허상임이 드러납니다.

극단적 부정

  • 공의 논리가 지향하는 바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 상을 짓지 않는 것, 그 정해진 틀과 상이 이 세계의 실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 세계를 대립적으로 보도록 형성된 인식 주체로서의 나를 부정하며 대립적인 틀 자체를 건너가면, 한 차원 높은 단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나’가 있습니다. 이를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반야의 지혜

  • 《반야심경》 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두 가지가 바라밀다波羅蜜多와 공입니다. 바라밀다는 ‘건너가기’입니다. 건너가서 도달할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건너가기가 아닙니다. 건너가기 자체가 바라밀다입니다. 건너가기의 존재적 근거이자 논리적 근거가 바로 공이고요
  • 세계가 어떤 완벽한 정체성을 지닌 채로 실체화돼 있으면, 실체화된 그 상태나 내용을 지켜야 하는 존재적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이에 반해 건너가기란 자기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아야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니 완벽한 정체성을 지닌 채로는 건너가기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세계가 공, 본무자성이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에 건너가기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아야’를 ‘자기 정체성을 부정해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 《반야심경》에서는 바라밀다, 즉 건너가기의 목적지는 어떤 내용으로도 정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향한 건너감이라고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라밀다라는 개념에 어디로 건너간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목적지는 없습니다. 동작, 오로지 동작만 있습니다. 건너가는 동작만 있습니다.
  • 무한한 건너가기와 무한한 부정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자기, 참된 자기를 기다리는 일이 지혜의 궁극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입니다

[에필로그]

공자를 궁금해하고, 노자를 궁금해하고, 붓다를 궁금해하는 분들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께도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궁금해한 적은 있으신지요? 자기를 읽지 않은 채 읽는 《논어》, 《도덕경》, 《반야심경》은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명품 족쇄일 뿐입니다. 자신을 궁금해하지 않은 채 만나는 공자, 노자, 붓다는 괴팍한 직장 상사나 표정 좋은 채권자에 불과합니다. 공자도, 노자도, 붓다도 모두 자신을 궁금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전을 읽고 나서 자신을 궁금해하는 버릇이 생긴다면, 그보다 더 큰 소득은 없을 것입니다.

- <건너가는 자>, 최진석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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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건너가자 건너가자 현재 있는 곳과 목적지는 생각하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만 생각하고 건너가자 건너가는 행동을 꾸준히 할때 내가 누군지 더욱 명확히 알수 있을 것이다.

건너가자 게으름 피우지 말고 핑계 대지 말고 아파서 고통에 빠지지 말고 건너가자

건너가야 보이고 들리고 새로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난다.

 

나를 알고 나를 찾고 나를 써서 나를 버리고 건너가자

 

아제아제 바라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모지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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