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지눌스님의 한 생각 공부

2022. 6. 11. 20:37수집/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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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스님의 행적에 대하 말씀을 드리는데 생업행적과 도업행적이 있는게 이게 불교에서 나눌 때 도업이냐 생업이냐 이게 아주 중요해요 도업과 생업이 있다.  도업은 도 닦는 거에요. 업은 행동하는 거고 절에서는 도업 밖에 없어요.

도업이라는 것을 얼마나 강조를 하느냐 사홍서원 하잖아요 그게 도업이에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팔상으로 도업을 성취했다. 

 

부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8가지로 나누어 팔상이라고 한다.

①도솔래의상은 전생의 부처가 도솔천에서 하얀 코끼리를 타고 이 세상에 와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입태한 일을 말한다. 광명을 내뿜으며 대지가 진동하고 악마들이 모습을 감추며 일월성신도 빛을 잃고 천룡들도 두려워하는 다섯 가지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②비람강생상은 4월8일에 부처가 탄생한 일이다.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7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③사문유관상은 부처가 태자였을 때 궁밖의 사문(四門)에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인생의 고통과 무상을 관찰한 일이다. 마지막 북문(北門)에서 사문 수행자를 만났고 이를 통해 출가를 결의하였다고 한다.
④유성출가상은 출가를 결심힌 태자가 부친 정반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2월7일 밤 궁을 몰래 빠져나와 출가한 일이다.
⑤설산수도상은 출가한 부처가 당시 사문들의 다양한 수행과 고행을 6년간 실천한 일이다.
⑥수하항마상은 부처가 35세였던 12월 8일에 보리수 밑에서 모든 악마를 굴복시키고 성도(聖道)를 성취한 일이다.
⑦녹원전법상은 성도한 부처가 전법(傳法)을 고민한 뒤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을 시작한 일이다. 이후 평생을 유행(遊行)하면서 전법하였다.
⑧쌍림열반상은 80세에 부처가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밑에서 최후의 설법을 마치고 열반한 일이다. 그 때가 2월 15일이었다. 입멸 연도는 서기전 383년경으로 전해지지만 이설이 많다. 탄생일, 출가일, 열반일도 동남아시아 불교권과 동아시아 불교권이 일치하지 않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팔상(八相))]
 

팔상(八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설(異說)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8상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유성출가상(喩城出家相)·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encykorea.aks.ac.kr

도업은 다른말로 하면 반야업이라고 하거든요 반야 바라밀 이 반야 바라밀로 도업을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보리살타도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구경열반 하시고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샴먁삼보리를 얻으셨다. 이 반야업이 도업이거든요. 그럼 생업이란 무엇인가? 생업은 생사업을 생업이라한다. 죽고 사는 업이에요. 죽고 사는 업은 맨날 살라고 하다가 죽고 맨날 사는데 맨날 죽어요.

스님 제가 무엇을 해보고 싶은데요 그러면 그것은 생사업이다 이렇게 지적하는 무서운 법문이 있어요.

맨날 살걱정하다가 죽는게 생사업이에요.

지눌스님께서 평생하신게 도업이신데 도업에 이렇게 소소영령하게 드러난게 흔치 않아요 그래서 이 지눌스님의 생애를 보면 아주 가슴이 뛰어요. 이렇게 살았구나

 

지눌스님의 생애를 보면은 태어나자 마자 아팠어요. 부모님이 아무리 약을 써도 안 낳으니까 부처님께 서원을 했어요 이 아이가 낳으면 출가를 시키겠다. 그러니까 병이 덜컥 났어요 참 기가 막히지 그러니까 약속대로 출가를 했어요. 8살 때 어디로 출가했느냐 하면 그 당시 화엄종 사찰도 있고 조계종 사찰도 있고 천태종 사찰도 있고 육아 유식종이라고 유식을 전공하라는 유식종 사찰도 있는데 이 네 종파가 4대 종이라고 그래서 고려를 대표하던 때인데 이때 선종 사찰로 출발했어요. 그 선종을 조계종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대표적인 것은 화엄종하고 조계종이고요 조계종 사찰로 출가를 했는데 어릴 때부터 한 스승에게만 배운 게 아니에요. 아주 특이해요. 그래서 학무상사라 배울학 없을 무 항상 상 스승 사 배우에는 항상 일정하게 정해진 스승이 없다. 그럼 어떻게 되냐 유도 지종 오직 도가 있는 분에게 가서 따랐다. 유도지종이에요. 오직 도가 있을 때 갈지 쫓을 종 가서 따른 거예요. 어느 한 분에게 정해지지 않고 그냥 도가 있는 분한테는 다 가서 배웠어요. 아주 특이한 이런 경우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일정한 스승이 없이 배움을 가졌는데 나이 스물다섯 살이 됐어요. 1182년 그 당시에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승려 고시가 있었어요. 그걸 승과라고 그래요 그 승과에 이제 참여해서 합격을 하고 결심을 해요. 나는 평생 도만 닦겠다. 도 닦는 데는 그 당시에 이제 계율만 하는 걸 율업이라고 그래요 율하고 업 염불만 하는 걸 염불업이라고 그래요 업자를 붙여요 또 화엄경만 하면 그걸 화엄업이라고 그래요 이렇게 많은 도업의 방법이 있었는데 이분은 조계종 이제 선종의 출발을 했기 때문에 선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 선을 하는 거를 정혜라고 그래요 정혜쌍수라고 정과 혜를 함께 닦는다 정이라는 건 멈추는 거고 혜라는 거는 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정을 닦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 마음이 산란해져요. 혜를 닦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 졸아요. 이게 그래서 마음을 딱 걷어들여서 멈추고 마음을 관찰하는 게 이게 좋은 걸로 어려운 말로 혼침이라고 그러거든요. 어둘혼 잠길침 마음을 딱 보면 혼침이 없어요. 또 마음을 딱 거두면 산란이 없어요. 그래서 항상 산란도 없고 혼침도 없이 마음을 보는 거예요. 이걸 관조라고 그래요 볼 관자 볼 조자 조견이라고 하는 빚을 조자인데 그게 볼 조자예요. 본다 뭘 보냐 마음으로 마음 보는 거예요. 마음으로 마음 보는 게 관조인데 그걸 혜라고 하라고요 그럴려면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서 멈춰야 돼요 그걸 정혜라고 그래 그래서 성과에 합격하자마자 딱 원을 세우기를 나는 평생 정혜만 닿겠다. 이렇게 원을 세우고 또 같이 정혜를 닦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았어요. 이게 결사예요. 결이라는 거는 맺을 결 사회라는 사회 모임 사자인데 모임을 맺는다고 혼자 닦는 게 아니라 여럿이 같이 닦자고 이게 정혜 결사거든요. 그렇게 정혜 결사로 이제 하자고 참여했던 사람들하고 약속을 하고 돌아갔어요.

 

돌아갔는데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어느 절에서 머물고 또 얼마 있다가 나이 스물여덟 살 1185년에 경상북도 예천에 가면 학가산 보문사라는 절에 들어가셨는데 굉장히 산중이에요. 거기가 당시에는 서울이 개경이거든요. 그래서 경주도 동경이라 그래 가지고 동쪽 옛날 서울이었잖아요. 잡초만 무성하고 그런 데 많거든요. 그러니까 이쪽으로 내려온다는 거는 저 서울 대도시하고 멀리 간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경상북도 예천군 하가산 보문사에 28살에 들어가세요. 들어가시고 거기서 한 3년은 확실하게 계셨고 3년 내지 한 5년 동안은 계시지 않았나 싶어요. 계시다가 어디로 옮기냐 은혜사 옆에 가면 거조사라고 있거든요. 팔공산 거조사로 옮겨서 거기서 옛날에 약속했던 사람들을 전부 다 불러 모아 가지고 정혜 결사를 시작을 해요.

 

그러다가 41세 때 41세 1198년 무년에 41세 1198년 무년에 지리산 상무주라고 지금도 있거든요. 상무주 앞에 거기 계셔요 상무주에 계셨다가 언제까지 있었느냐 43세 천2백 년 경호년까지 거기 계셨는데 1200년에 조계산 수선사 지금 송광사에요. 수선사로 가셔서 11년을 거기서 교화를 해요. 11년을 송광사에서 그러다가 53세 1210년에 열반의 뜻이거든요. 지금 보조스님이 계셨던 곳을 다녀보면 전부 다 산중 사찰이고요 오로지 정혜쌍수 설법교화 그것 뿐이에요. 다른 일은 좀 전혀 없어요. 여덟 살에 절에 와가지고 산중 사찰만 산중 사찰만 다니면서 정혜쌍수 설법교화 그야말로 도에 그렇게 세밀하게 정진하신 것이 딱 드러나니까 정말로 감동스러워요. 행적은 그렇고요 이제 입도 인연이라고 그러는데 도에 둔다. 이 말은 깨닫는다 이 말이거든요. 인연이라는 것은 깨닫는 사례 사실 요즘 말하면 사연 무슨 사연 그리 많아 뭐 그런 말도 있잖아요. 그 사연이에요. 일어난 일 그 깨달음이 일어난 일 그걸 인연이라고 그래요 입도 인연 도에 든 인연이다. 입도 사연이에요. 보조 스님이 언제 어떻게 깨달았나 또 입도 인연을 보면 깨달음이라는 게 이게 누구나 다 할 수가 있는 거로구나 이걸 알 수가 있어요.

 

25살 승과에 합격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땐데 하루는 밝은 창 앞에서 육조단경을 보는데요. 육조단경에 뭔 말이냐 그러면 진여자성이 진여자성은 우리 일체 중생 청정불성이에요. 진여자성이 기염하여 생각을 일으켜서 뭘 하느냐 수 견문각지나 비록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이걸 견문각지라고 그러거든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보고 듣는 건 눈과 귀가 하고요 느끼는 거는 비설신 코도 느낄 때 각이라고 그러고 혀도 느낄 때 각이라고 그러고 몸도 느낄 때 각이라고 그러고요 그다음에 의 생각이 느끼는 거를 알지자 지를 써요. 그래서 안이비 설신의 육근인데 이거를 기능으로 보면 견문각지라고 그래요 그럼 이게 눈이 보는 게 아니라 진여자성이 보는 거예요.

 

진여 불성이 보는 거예요. 눈은 이거는 진여자성이 움직이지 않으면 못 봐요 또 눈은 이게 파괴가 되면 또 못 봐요 숨이 떨어지면 또 못 봐요 우리가 우리 말 속에 운명하셨다. 이러잖아요. 그거 말로만 그렇지 알고 보면 아주 허망한 용어예요. 떨어질 운자가 있고요 목숨 명자가 있는데 목숨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숨이에요. 숨 숨졌다. 이거를 운명하셨다. 이래요 이 언어의 이게 마술이라는 게 아주 희한한 그냥 숨진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숨 쥐면 눈도 못 보고요 귀도 못 듣고요 이래요 그러니까 이게 눈이 보는 게 아니라 진여 불성이 보는 거다. 이걸 중생이 모르는 거예요.

 

진여 불성이 보는데 눈이 보는 줄 알고 진여 불성이 말하는데 혀가 말하는 줄 알고 이래가지고 속아서 살다가 속아서 죽는 거예요. 그런데 지눌 스님은 육조단경을 딱 보다가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켜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나 그러나 뭐 어떻게 되냐 진성은 상자재라 그 진여자성은 항상 자제한다 죽고 사는 게 아니다. 견문 각지하나 항상 스스로 있다. 죽는 속에 죽지 않는 것이 있다. 이걸 진여 불성이라 그래 이거를 딱 보는 순간에 아주 놀라고 기쁘고 놀란다는 거는 몸이 부르르 떨린다는 거예요. 이게 사람은 몸과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정신적으로 큰 변화가 있으면 몸이 움직여요 그걸 놀랜다 그래요 지금까지 몰랐던 거 아니까 아주 기뻐요 그래서 놀랄 경 기쁠 희자를 썼어요. 경희했다. 그럼 이제 이런 경우에 경 보다가 깨닫는 경우에는 눈에서 불이 나요. 그리고 뭐 기억나서 깨달은 경우에는 몸이 그냥 뚝 떨어져요. 반드시 그 깨달음을 얻을 때는 몸에 반응이 와요. 그리고 깨달음이 이제 내일 모레쯤 온다. 그러면 가슴에서 뭐가 뚝뚝 떨어지는 걸 경험을 해요. 몸이 먼저 반응해요. 몸이 희한한 거예요. 이게 몸이 먼저 알아요. 그러니까 이거 놀라고 기뻐했다. 이게 놀랐다는 건 몸이 크게 움직였다. 몸이 안 움직이는 건 놀라는 게 아니거든요.

 

아주 기뻐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지금까지는 습득을 했는데 익혀서 얻었는데 습득 깨달음이라는 건 자득하는 거예요. 스스로 얻는 거예요. 자득 습득 그래서 습득이 깊어지면 자득을 해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스스로 돼요. 그래서 깨닫기 전에는 배운 대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배움이 점점 깊어지면 깨달음이 오는데 그게 자득이에요.

 

그러니까 그 후로 학가산 보문사로 가신 거예요. 가서 이 선문에서 이제 이야기하는 내용을 어려운 말로 조사 선지라고 하거든요. 조사 조사께서 가르치는 선의 뜻 조사 선지 이게 선문 종지라고도 하고요 조사 선지라고도 하고 선에서 중심적으로 가르치는 뜻이다. 선문에는 조사 선지가 있고 대표적인 화엄종에서는 화엄 원교라고 그러는데 원교 원교는 원융 무애를 말하는데요. 화엄은 둥글 원자 가르칠 교자 원교인데 원교는 원융무애요. 원융무애가 뭐냐 법성이 원융하야 무이상이라 이게 원융이거든요. 법에는 성이 있는데 이 법은 다르지만 성은 원융해 법 차별 성 원융 법은 차별되요 하늘도 법이고 땅도 법이고 사람도 법이고 태산도 법이고 미진도 법이고 가는 티끌도 법인데 성은 하늘 법성이나 땅 법성이나 사람 법성이나 티끌 법성이나 원융해요. 둥글게 다 융통해요. 원교는 사사가 무애에요. 사사 무애가 뭐냐 의상 스님의 법성계를 원교 종요라고 하는데 원교의 아주 근본 요점이다. 이 말이에요. 종요라는 말은 종교라는 종자 요점 요점 그런데 거기 보면 일미진중 함시방이요 한 가는 티끌 속에 시방을 다 포함한다 이거 그거 맞죠. 금강 반야 바라밀만 생각하면 맞는 거지 틀림없는 거죠.  일미진중 함시방 또 무량 원겁 즉일념 이게 사사 무애라는 거예요. 무량원겁도 일이고 또 무량겁도 일이고 또 일찰나도 일이고 무량원겁 무량원겁 즉일념이라 일념이라는 건 일찰나거든요. 무량원겁 도 일이고 또 찰나도 일인데 이게 그냥 융통해요. 이걸 무애라고 그래요

 

또 시방 허공과 일미진이 시방 허공도 사물이고 일미진도 사물인데 그래서 미진 사물이나 허공 사물이 걸림이 없어 이걸 무애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화엄에서는 원교인데 원교는 법성원융 사사 무애를 가르치는 건데요. 그거 근본 요점을 가르친 게 법성계예요. 그런데 이 지눌 스님이 가만히 생각하니 선문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다 이걸 가르치거든 즉심즉불이라고 그래요 마음이 곧 마음이 곧 부처다 근데 화엄에서는 원융무애를 가르쳐 법성원융 사사무애 선문에서 가르치는 즉심즉불하고 화엄에서 가르치는 원융무애하고 이게 같은 건가 다른 건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화엄종장 화엄 대가에게 가서 물으니까 즉심즉불을 관하지 말고 사사 무애를 찾아라 이렇게 가르쳐 근데 지눌 스님은 즉심즉불은 이미 깨달은 바가 있는데 마음을 떠나서 다른 거를 관찰하는 게 과연 옳은가 이래서 원융무애하고 즉심즉불하고 이게 같은 내용인가 다른 내용인가 이거를 알기 위해서 3년 동안을 예천 보문사에서 경전을 열람을 했어요.

 

그래서 3년이 됐는데 화엄경의 여래 출연품에 아 이거 참 기가 막힌 거 여래 출연품에 뭔 말씀이 있느냐 그러면은 여래지혜가 구족재어중생신중이이라 여래의 지혜가 구족히 중생의 몸속에 다 있다. 그런데 단 범우가 범부의 어리석은 이들이 망상 집착으로 부지불각이라 망상과 집착 때문에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이 말이 있어요. 여기서 그냥 그 의심이 확 다 없어진 거예요. 경에서도 여래의 그 광대무변한 지혜 광명이 중생의 몸속에 구족히 다 있다는 말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왜 못 깨닫느냐 범부의 그 망상 집착으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이 말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선에서만 마음이 부처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경에서도 여래 지혜가 구족히 중생신중에 다 있는데 다만 못 깨닫는 이유는 망상 집착 때문에 못 깨닫는다고 한다 여기서 선과 교에 대한 의심이 하나도 없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이런 게 깨달음이에요. 이건 자득이에요. 깨달음이라는 건 스스로 얻어서 의심이 없어진다는 거거든요. 스스로 얻어서 자득 무의 자득해서 의심이 없어지는 게 그 깨달음이거든요. 그래서 선종에서 즉심즉불을 가르치는 거나 화엄경에서 여래 지혜가 구족히 중생 몸 속에 다 있다고 하는 거나 조금 더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다만 이제 의심이 가는 건 그러면 범부가 최초의 도닦는 문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 거기도 의심이 생긴 거여 그래서 통연장자 화업론이라고 있는데 그 통현장자 화업론을 보니까 그런 말이 있어요. 마음이 바로 법개다 온 우주 법계가 바로 마음이다 또 마음이 바로 지불이다. 지혜 부처다 마음이 바로 문수보살이다. 이 말이 있는 거예요. 심즉법계 심즉지불 심즉문수 요걸 딱 믿는 게 그게 최초 신심이다. 이게 마음이 법계요 마음이 지혜불이요 마음이 문수보살이오 이걸 딱 믿으면 그게 신심인데 그 신심이 들면 바로 그냥 초발심이 구경각이 되는 거예요. 초발심이 없으면 구경각이 없어 종자를 심지 않으면 열매가 없어요. 그래서 최후 성불하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게 절대로 아니고요 최초 발심이 더 중요해요. 최초 발심 구경 성분 그래서 이게 종자를 심으면 이게 자라가지고 꽃 피고 열매 맺게 해서 나중에 열매가 맺히잖아요. 그럼 열매를 따보면 처음. 심었던 종자예요. 그걸 법성원융이라고 그래요

 

아 이거 참 기가 막혀 기가 막혀 그래서 의심이 없는데 나중에 이제 41세 때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대해보각선사 어록이라고 30권이 있는데 그 뒷부분이 요즘 강원에서도 가르치는 대 서장이라는 거고요 앞부분은 또 어록이 있는데 거기에 일부러 찾는다고 이거 애 먹었는데 몇 권이 나오나 30권 중에 제 19권에 그런 말씀이세요. 선이라는 거는 마음 보는 게 선인데 마음을 찾아보는 거는 마음을 보는 것도 선이라고 그러고 마음 또 자체도 선이라고 그러고 이거를 어려운 말로 마음을 보는 거를 마음 찾아본다고 그래가지고 능할 능자 조견이라는 볼 조자 능조라고 그러고요 마음 자체를 마음이 봐서 마음이 보여지는 마음을 소조라고 그러는데 장소라는 소자 그래서 능소 일체라고 이 어려운 말로 해 보는 마음과 보여지는 마음이 한 마음이다 이거 어려운 용어예요. 이거 이런 거 안 하면 쉬울 텐데 왜 자꾸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보잖아요. 보는 마음은 보는 마음이고 보이잖아요. 보이는 마음은 그게 또 마음인데 그걸 보는 마음을 능조심하고 보여지는 마음을 소조심 그런다고 장소라는 학자 그런데 선에서는 보는 마음도 선이라고 그러고 보여지는 마음도 선이라고 그러고 이제 막 같이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뭐냐 부재정처하고 고요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부재 료처하고 마음은 시끄러운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마음은 사량 분별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또 일용 응연처 밥 먹고 옷 입고 왔다 갔다 하고 그런 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요한 것을 떠나서 사량 분별을 떠나서 시끄러운 것을 떠나서 마음을 찾지 마라 홀연개안하면 홀연히 눈을 딱 뜨면 이 고요하고 시끄럽고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전부 마음 안에 있는 일이다. 이런 마음이 있어요. 또 이걸 보고 또 마음이 더 확 열렸어 이게 이제 세 번째 깨달음인데요. 그래서 이제 지눌 스님이 무슨 말씀을 했느냐 그러면은 자신이 육조단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고 또 예천 보문사에 가서 또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자득 수행을 했다.

 

스스로 얻어서 수행을 했는데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애음물이라고 그러는데 가슴에 뭔가가 걸리는 게 있어 애음물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그걸 정견미망이라고 감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서 뭔가 답답한 게 있어요. 가슴에 뭔가 이렇게 걸리는 게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지리산 상무주에서 대해 서장을 보고 눈을 크게 뛴 뒤부터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도라는 건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한 게 이게 최상의 도예요. 죽을 때도 편안해요. 몸이 아파도 편안해요. 목이 날아가도 편안해요. 배가 아파도 편안해요. 하늘이 무너져도 편안해요. 이게 법성원융이요 즉심즉불인 거예요. 마음이 바로 부처고 법성이 원융하다 사사 무애다 그런데 최후까지 남는 게 이게 몸이 편안하냐 안 하냐 이게 아주 중요한 거거든요. 근데 사람에 따라서는 꼭 지눌스님과 같이 이런 절차를 겪는 게 아니에요. 딱 깨닫는 순간에 그냥 온몸이 편안한 경지에 오르는 건데요. 이걸 돈오 돈수라 그래요 깨달음도 한꺼번에 됐고 깨달음도 한꺼번에 됐다. 그렇게 되면 이제 여러 번 깨달아서 초지에서부터 십지까지 올라가는 이런 점차 점득이 있단 말이에요. 이게 점차와 이게 돈오가 사람에 따라서 다른 거지 다 똑같은 건 아니에요. 예를 들면 땅에 종자를 심어서 점점 자라가지고 꼽히고 하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땅에서 나자마자 한꺼번에 그냥 꼭대기까지 다 크는 것도 있어요. 그런 거 보셨어요. 대나무 대나무는 그냥 나자마자 다 커버려요. 그리고 이제 저 산중에 있는 물이 바다까지 갈 때는 이게 냇물도 되고 뭐 강물도 되고 넓은 물로 거쳐서 바다에 들어가잖아요. 근데 안 그런 것도 있어요. 산수가 바로 해수가 되는 수가 있어요. 산물이 바로 바닷물이 바다 옆에 있는 산에서 바다로 똑 떨어지면 바로 바닷물이에요. 그거 보셨죠. 산물이 그냥 똑 떨어지면 바로 바닷물이에요. 그러니까 돈오 돈수라든지 돈오 정수가 사람에 따라서 있는 거지 전혀 이게 없는 게 아니고 다 있다. 이거예요. 근데 문제는 하면 다 깨닫는다 이거예요. 왜냐하면 중생 속에 다 있기 때문에 근데 왜 못 깨닫느냐 망상 집착 때문에 못 깨닫는다.

 

<내 생각>

 

먼저 지눌스님에 대하여 찬탄과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평생을 생업이 아니라 도업에 정진하시고 스승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보다 스스로 공부하고 의심하고 깨닫고 비판하고 적용해 보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에 대하여 습득하면서 자득하신것을 보고 모든 세상사가 일하고 배우는 것들이 이렇게 해야 되지 않을 까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맑히고 정 과 마음을 바라보는 혜에서 졸게 되는 것은 혜를 잘 닦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신 부분이 와 닿았다. 망상과 집착을 내려놓은 연습을 하면 되는줄 알았지만 할게 너무 많은것을 다시 느끼는 법문이었다. 무량원겁 즉일념 일미진중 함시방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즉일념을 계속 관조하는 연습을 해야 할듯 하다. 세상에서 벗어나서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마음자체가 즉불임을 명심하고 계속 관조해야 겠다. 관조 하는 연습을 화두를 붙잡고 하는 방식으로 할려고 하니 쉽지 않다. 위빠사나 초기 불교에서 수행하는 방법도 같이 시도해봐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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