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2024. 9. 28. 21:28ㆍ정리/마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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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 예스24
세계적인 교양서이자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고전.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로 신학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친 마르틴 부버의 대표작이다. 부버는 이 책에서 세상에는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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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후기]
- [P206] 부버는 예언자다운 형안으로 고도의 기술 혁신에 의한 기계화가 인간의 비인간화, 자기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꿰뚫어보았다. 위기의 핵심은 오히려 이러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그의 이른바 근원어 '나-그것'의 지배 아래 스스로를 매몰해 버리는 데 있으며, 이미 사람이 근원어 '나-너'를 말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버는 깨어진 세계, 인간의 자기상실, 원자화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깨어진 데서 온 것으로 보고 이를 결코 객체화될 수 없는 주체이며 인격으로 공존하는 '나'와 '너'의 만남, 곧 '나'와 '너'의 대화를 통하여 회복하려고 하였다.
- [P212] '나-너'의 세계와 '나-그것'의 세계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하나의 세계의 전체를, 모든 사람, 모든 인간 활동을 꿰뚫고 있는 이중성이며 상호적인 것이다. 과연 사람은 '나-너'의 관계에서만은 살 수 없으며, '그것'과의 관계는 극복될 수 없는 것, 극복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대적 상황이 비근한 일상생활에서의 의식이나 행동에 삶의 원리가 되어 있는 여러가지의 사고법에서부터 정치-경제 분야에서의 대규모적이며 조직적인 활동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전적으로 '그것'의 지배에 내맡겨져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저자 후기]
- [P183] 우리는 과연 존재의 여러 계층을 고찰할 때 자발성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가 인정하는 일체의 존재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답'이나 '말 건넴'에 대하여 그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대답이나 말 건넴과 같은 것으로 논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의인화하는 비유보다 다른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니-너-관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 우리의 사고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 적인 것에 대한 사람의 사고를 규정하는 원규범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자연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 즉 말이나 작품 속에 계속 살아가는 정신의 영역과 말이나 작품이 되려고 하는 정신의 영역에 있어서도 - 우리에게 미쳐오는 작용은 존재자로부터 작용해 오는 것으로 이해되어 좋을 것이다.
- [P189] 스피노자가 생각했듯이 세 가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원을 이루는 정신성과 우리가 자연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가운데 나타나 있는 자연성 외에 제3의 것으로서 인격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이 속성에서 나의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인격으로서의 존재는 유래한다. 마치 나와 모든 사람의 정신적 존재와 자연적 존재가 저 정신성과 자연성에서 유래하듯이, 그리고 이 제3의 속성인 인격성의 속성만이 그의 속성으로서의 특질에 있어서 직접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 문장]
- [P152] 어떤 현대 철학자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신이 아니면 '우상'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우상이란 어떤 유한한 재화 - 자기의 국가, 예술, 권력, 지식, 돈벌이, '항상 새 여자를 정복하는 일'따위로서 - 이러한 유한한 재화가 그에게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 그와 신 사이에 들어서 있다. 그러므로 그 우상을 '때려 부수'려면 이러한 유한한 재화의 제약성을 사람에게 증명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빗나갔던 종교적 행위는 저절로 그에게 합당한 대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 [P8] 근원어 '나-너'를 말하는 것이 타자를 객체화하는 것이 아닌 '관계'를 세우고, 근원어 '나-그것'을 말하는 것이 타자를 객체화하는 '경험'이나 '이용을 야기시킴을 말한다.
- [P87] 고립된 자아의 아집에 사로잡혀 공허한 마음의 울타리에서 끊임없이 쫓기며 맴돌고 있는 존재가 어떻게 자기를 집중할 수 있겠는가? 자의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유를 깨달을수 있겠는가? - 자유와 운명이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듯이 자의와 숙명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자유와 운명은 서로 서약하고 껴안으면서 하나의 의미를 이루지만, 자의라는 영혼의 요괴와 숙명이라는 세상의 악령은 서로 계약을 맺고 나란히 동서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피하고, 맺어지는 일도 없고 강하게 접촉하는 일도 없이 무의미성 속에 떠돌고 있다. 자유인이란 자의에 속박되지 않고 의욕하는 사람이다. 그는 현실을 보고 있다. 즉 '나'와 '너'의 실제하는 두 존재의 실재적인 결합을 믿고 있다. 그는 운명을 믿으며, 그것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믿는다. 운명은 그를 마음대로 부리지 않는다. 운명은 그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운명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온 존재를 기울여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며, 그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의 결단이 의도하는 대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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